[프락치를 거부한 아름다운 우리!]
학생운동을 하고 감옥에 갔다온 우리들 사이에서
대화의 금기주제가 있다.
고문과 변절.
전두환군부독재에서 빵잡이가 된단 건
출세 못하고 취직 못한다는 의미였다.
자기만 그럼 견딜만한데
일가친척 모두 불이익을 당하는 연좌제가 작동했다.
당시 빵잡이 중 공영방송 스크립터나 구성작가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신기했다. 군부독재 수사기관의 배려가 작동했단 걸 나중에 알았다.
프락치란 단어가 섬찟한데
그들 요구사항도 별개 아니었단다.
같은 학교 빵잡이 동향 즉
친구들 동향을 가끔 묻고 답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니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 다는 것.
동향 심화버전으로 나가면
당근의 무게도 커지는 법이었을 게다.
돌아보니
그시절 빵잡이 다수에겐
그런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백수생활,
눈치 안주는 듯
눈치주는 가족들,
무엇보다
사회에서 제외된 자의 무료한 일상의 지리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견디기 힘들 때
유혹이 올 경우 흔들릴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빵잡이 99%는
그 유혹을 뿌리쳤다.
군부독재에 부역하고
빵부스러기 얻는 게 싫었다.
정의가 아니니까 거부하는 거였다.
내게도 잠깐 그런 유혹의 손길이 있었다.
머리가 잘 안도는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외출이 어렵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니
동향을 잘 모른다"
고 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후 공장에 취업했다가
해직언론인 선배들의 "말"지에 들어갔다.
어느 영역이든 늘 극소수의 배반자는 있어왔다.
배반의 대가로 빵을 얻고 직을 얻기도 했을 터,
그냥 "나도 피해자식의 궤변"은 안함 좋겠다.
프락치는 그냥 프락치다.
먼 기억 속으로 다녀온 아침,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든다.
민주화에 목숨을 속절없이 바치려한 젊은 우리들은
아름다웠다!
-최민희 전의원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