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읽어보세요!
'윤석열'이라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
삶창에서 출간 된 '언어 전쟁'에서 문학 비평가 고영직의 "시적 언어와 행정의 언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을 죽여라'는 명령을 표현한 말이 바로 "유태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누가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을 몰살 시키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라는 예시로 이 말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걸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세계 1차 대전 때 신무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때 나온 것이 비행기, 탱크, 잠수함 그 다음에 독가스가 있었다. 독가스는 1차 대전 때 나왔다. 해서 2차 대전 때 뭐 총살하는 것도 아니고 찔러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목욕탕 같은 곳에 사람을 집어 넣고 독가스를 내보내서 전부 죽이고 소각했던 것이다. 이건 자기가 직접 총을 쏴서 죽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어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옐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자신은 그저 행정적인 절차를 실행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우린 관료주의라고 부른다.
본인이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른다. 용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추방은 재정착, 가스실에서 죽이는 것은 최종해결, 이린 식으로 얘기하면 끔찍한 학살에 대한 그 어떤 사고의 반성도 없어지게 된다.
즉 관료주의에서는 언어적 오용도 같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멀리서 볼 것도 없이 윤석열이 후보자 시절 '전두환이 다 잘못했냐?' 고 말했던, 80년 광주를 보자. 80년 5.18 민주화 항쟁을 진압한 공수부대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다. 영화도 있지 않나! 그러니 이건 진짜 공수부대원들이 휴가 나가는 것처럼 광주에 내려간 것이다. 그게 휴가였는가? 왜 그런 식으로 할까?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다. 이런 식의 언어적 오용 그리고 기술관료주의들이 생각을 없게 한 것이다.
현대 관료주의와 지식인들에 의한 언어적 학살이 더 무자비한 것이 그런 학살을 시행하는 사람들이 판단에 대한 무능력, 말에 대한 무능력, 사고에 대한 무능력 소통도 없고 생각도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문 경찰관 이근안이라고 있다.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난 철저하게 상명하복의 원칙을 지켰고. 조직의 절차를 실행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고문이라는 것을 행정 절차라고 말하며 자신은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 했다. 이근안은 실제로 십자가를 졌다. 목사가 됐다. 어깨탈골의 전문가라고 하는 이근안은 자신의 저지른 고문 휴유증으로 죽은 김근태 의원에게 사과할 의사가 없냐고 했더니 '자기는 사과할 일이 없다' 고 해서 그 교단에서 파면을 당했다. 이런 범죄(군국주의 일본, 파시즘하의 독일, 국가보안법 하의 독재)를 저지른 사람들은 아주 당당하다. 오히려 자기들은 상명하복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들의 희생으로 조직이 살았다고 얘기한다.
허나 이건 인류에 대한 죄악이다. 아이히만이나, 전두환이나 이근안처럼 관료주의에서 항상 따라다니는 언어적 오용은 인간의 사고능력을 마비시켜 그 어떤 것에서도 공감이 없어지게 만든다. 이게 악의 평범성이다. '악의 평범성'은 뭐 거창한 철학적 의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출현이다.
지금 대통령이 된 윤석열도 똑같다. 종북, 주사파는 '반국가세력'이라고 말하는 윤석열 대통령. 이'반국가세력'이라는 말로 이 사회는 수 많은 사람들을 사회와 격리시키고, 국가가 직접 사법 살인도 자행했다. 이 아픈 한반도 남쪽의 비극을 윤석열이 모른다 할 수 있나! 또 이런 윤석열의 어처구니 없는 발언에 어떤 분노도 느끼는 지 못하는 이 사회는 도대체 뭐냐 말이다.
이것은 언어, 즉 너와 내가 주고 받는 일상의 언어가 아닌 명령을 내리고 실행하는 관료적 언어가 일상의 언어를 오염시키면서 시작된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한국은 검찰개혁이라는 블랙홀에 빠졌었다. 분명 이것은 정치권에서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블랙홀로 만든 것은 미디어와 미디어를 분석해서 평가를 내리는 일명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미디어가 파시즘이었지만 현재는 미디어보다는 전문가들이라고 불리는 대중과 다른 언어를 쓰는 지식인들이다.
이들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수 많은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슈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대중을 현재의 구조에 종속시키는 지배 권력의 대리인을 뜻한다.
그들은 지배 권력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역할은 지금의 구조를 지속 시키는 것이다. 그들이 제일 잘 구사하는 언어로 사회를 '틀'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정치에서 수구- 국민의 힘, 보수 - 더블어 민주당이 양분된 보수-진보의 적대적 세력처럼 보이지만 한 지배블럭인 것처럼 말이다.
매번 말하지만 지난 조국 올해 추미애 윤석열에 대한 옹호와 비판의 목소리 반의 반이라도 이 사회 먹물들이 사회 몫 없는 자들의 죽음과 비참한 삶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면 이 사회는 정말 백걸음은 앞으로 전진했을 것이다. 이 사회가 한 해에 2,000명 씩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위해 서초동 거리를 십자가로 만들고, 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적이 있었나! 이것을 뒷받침 한 것이 지식인(전문가)들의 언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자본의 사람에 대한 차별과 배제로 생긴 이윤에 의해 정착되었다. 이것을 공정경쟁이라는 '공정성'이라고 받아 들이게 한 것이 언어의 힘이다. 그뿐인가 벼랑끝에 몰린 사람들을 협박해 생존권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을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말했고 기업가들이 저지르는 살인을 '중대 산업 재해'라고 말한다. 그게 어떻게 재해인가? 그건 분명 살인이니 '기업 살인법'이라 불러야 되는 것은 상식인데 자본주의는 결코 자본에게 불리한 언어를 통용시키지 않으려 한다. 물론 현실은 살인을 순화시킨 '중대재해법'조차 막혀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인간화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람이 아닌 소모품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은 김용균의 사고에서 나온 정규직 관리자들의 태도였다. 벨트와 롤러 사이에 몸이 끼인 김용균의 시신은 머리와 목이 분리되어 있었고, 등은 가라져 타버린 상태였다. 4시간 만에 김용균의 시신을 발견한 회사는 김용균의 동료들에게 석탄 자루에 시신을 수급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이 저 히틀러의 '유태인 최종적 해결' 이라는 언어와 무엇이 다른가?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만든 어쩜 가장 악랄한 모습을 너무 평범하게 보여주고 있다. 악이 평범화 되어서 상식이 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 문예들과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말아먹는 것은 서로 자기들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 세력 때문이라고 핏대를 높혀 말하고 있다. 제발 그 입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지옥은 자신들이 당하는 일이 아니라 외면하면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입에 담을 수 있나? 겨우 열아홉 고등학생들이 산업 현장에서 죽어 나가고, 20대의 청년은 스크린 도어에 몸이 찢겨서 죽고, 빵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고, 시도교육청이 정규직(임용고시)의 인원을 줄이고 그 자리에 기간제 교사를 채용해서 발령을 내고도 학생들을 먼저 구하기 위해 숨진 세월호 교사를 비정규직이라고 차별하는 이 사회를 보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지 나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가 다른 것일까!
현재가 견딜 수 없이 슬픈 세상인 것은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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