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

반유신투쟁 기도로 시작했다!

양현모 2011. 12. 20. 19:08

반유신투쟁 기도로 시작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와 가톨릭, 신구 교회의 참여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재야 민주화운동권에서 신구 교회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현저하게 높아졌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기독교계의 사회참여는 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목소리가 커진다.

71년 10월5일 천주교 원주교구에서는 지학순 주교와 교구사제단 전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부정부패 규탄시위가 일어났다. <문화방송> 원주방송국에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던 교회가 더는 부정부패를 방관할 수 없는 임계점에서 시위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정치·사회 문제에 애써 침묵으로 일관하던 천주교회에서 일어난 초유의 사태였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 김수환 추기경은 이례적일 만큼 강경한 성탄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 추기경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에 대해 정부에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은 과연 국가보위법이 필요불가결의 것이라고 양심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 이 법은 북한(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73년 4월22일 새벽 5시 남산 야외음악당에서는 부활절 연합예배가 거행되었다. 이는 개신교의 진보와 보수 세력이 모처럼 자리를 같이한 대규모 행사였다.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김동완 전도사 등은 이 연합예배를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는 계기로 삼고자 펼침막과 전단을 미리 준비했다.

펼침막에는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서글픈 부활절, 통곡하는 민주주의’, ‘사울왕아,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등이었고, 전단에는 ‘회개하라, 때가 가까웠느니라’, ‘주님의 날이여, 어서 오시옵소서’ 등을 내걸었다. 이렇게 펼침막 10개, 전단 2000여장을 어렵게 제작하기는 했지만, 정작 당일 펼침막은 걸어보지도 못했고, 전단만 일부 배포했을 뿐이었다. 워낙 많은 경찰이 출동한데다 적절한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부활절 연합예배는 끝이 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70여일이 지난 7월7일 검찰은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를 비롯한 일당 15명이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 장소에 모인 10만여 군중을 4개 방향으로 유도, 중앙방송국을 점거하고 이어 중앙청을 비롯한 관공서 등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는 등 내란음모를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 사건’이었다. 이는 물론 억지로 조작한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은 개신교 민주화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유신정변 이후 기독교계 최초의 저항이었으며, 동시에 교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집중적인 핍박을 받게 되는 그 시작이었다.

 

» 1973년 4월22일 새벽 5시부터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수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 장면. 그해 7월 박정희 정권에서 내란음모 기도를 했다고 발표한 ‘남산 야외음악당 부활절 예배 사건’은 해방 이후 기독교계의 첫 시련이자 반유신 민주화운동 참여의 기폭제가 됐다.
■ 목요기도회의 탄생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작·발표되자 처음 당하는 큰 시련에 기독교계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차 함께 기도하는 의미를 몸으로 체험해 나가기 시작했다. 기도는 인간의 본능이자 인간의 본질에 속한 행위다. 그들은 함께하는 절규와도 같은 기도를 통해 교회 안의 일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잃었던 용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개신교에서는 목요기도회·금요기도회·갈릴리교회, 가톨릭에서는 명동성당 기도회를 비롯한 동시다발의 기도 집회가 열리기 시작한다. 김관석 목사의 지적처럼 한국 기독교회의 70년대 반유신 투쟁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찾았다. 그곳에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교회여성연합회 등이 있었다. 이들 사무실은 구속자 가족들의 간이 집합소이자 짐을 맡기는 곳이었고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73년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때의 기도체험이 되살아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74년 7월18일 오후 2시 허병섭·김상근·이해동·문동환 목사 등을 중심으로 구속자 가족 등 22명이 기독교회관 2층 소회의실에 모여 민청학련 사건 및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공의(公義)를 위한 기도모임이 재개된 것이었다. 이날은 화요일이었지만, 이것이 목요기도회의 출발이었다.

 

목요기도회는 구속자 가족들의 모임 공동체, 나아가서는 석방운동의 구심점으로 구실했다. 탄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악착같이 기도모임을 지키고 키워 공중예배로 발전했다. 2월6일 발표한 독자 성명에서는 순수한 신앙행위 단체로서, 어떠한 탄압과 방해 속에서도 기도의 행진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탄압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5년 2·15 석방조처로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들이 풀려나오고, 목요기도회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유신정권의 폭압성과 조작극이 계속 폭로되자 박정희 정권은 탄압을 더욱더 가중시키기 시작했다. 75년 초부터 예배 장소 구하기가 어려워지더니 3월18일 목요일에는 서울복음교회로 장소를 옮겨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김상근 목사의 사회와 설교로 기도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국의 방해로 서울복음교회마저 사용할 수 없게 되자 4월1일에는 이문영 교수의 자택에서, 4월8일에는 윤반웅 목사의 자택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급기야 유신정권은 4월9일 김상근·이해동·문동환·모갑경 목사 등을 연행하여 2~3일, 길게는 1주일씩이나 구금 조사하면서 목요기도회에 참여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4월15일 문동환 목사 자택에서 기도회를 열긴 했지만, 5월부터는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5월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잠시 중단됐던 목요기도회는 75년 가을 수도권 선교자금 사건의 공판일을 앞두고 재개됐다. 9월18일 한국사회선교협의회 사무실에서 김상근 목사의 설교와 김경락 목사의 사회로 사회선교 유관단체 실무자 중심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9월25일에는 서울제일교회에서 1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오충일 목사의 설교로 기도회가 열렸다.

이처럼 공식적인 목요기도회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열리는 가운데, 76년 1월15일 구속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목요기도회가 오전 10시에 재개되었다. 이렇게 두 개의 목요기도회가 진행되고 있던 중, 76년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터지면서 금요기도회가 새로 탄생한다.

 

 

 

» 1974년 7월18일 오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구속자를 위해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2층 소회의실에서 열린 기도모임은 이후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목요기도회’로 자리잡았다. 70년대 후반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목요기도회의 연단 앞줄에 문익환·문동환 목사 형제와 함세웅 신부 모습이 보인다.
■ 금요기도회로 발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발표된 직후인 76년 3월1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제1차 실행위원회는 공식적인 목요기도회의 주최자로 선교자유대책위원회를 지정하기로 결의했다. 이 위원회는 요일을 금요일로 바꿔 76년 5월3일 오후 6시 기독교회관에서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금요기도회를 열었다.

 

금요기도회로 바뀐 것은 3·1 사건의 재판 날짜가 토요일이어서 재판 전날 기도회를 하고(때로는 밤샘기도로 이어졌다) 다음날 재판 방청을 하는 것이 정해진 일정처럼 되었기 때문이었다.

77년 들어서 목요·금요 기도회는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고난받는 형제를 위한 기도회’로 불린 금요기도회는 인권을 위한 기도회로 발전했다.

 

특히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도시빈민의 인권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는 기도회로 그 내용과 외연이 확장되었다. 77년 10월28일 삼고사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회로 열렸고, 11월8일, 12월23일, 78년 2월17일에는 평화시장 노동자를 위해, 78년 1월27일은 방림방적 노동자를 위해 열렸다. 이제 금요기도회는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억울한 자들의 통곡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으며, 사회정의를 위해 소리내어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참석자들도 200명 선으로 불어났다. 금요기도회는 79년 10월 유신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0·26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 1975년 2월6일 밤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의 인권기도회를 마친 신도들이 애국가 등을 부르며 거리시위에 나서 경찰과 맞서고 있다. 당시 기도회는 단순한 종교집회가 아니라 유신정권의 폭압에 맞서 민주화를 부르짖을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다.
■ 갈릴리교회의 수난

75년 7월9일 유신정권은 베트남의 패망을 빌미로 사회안전법·방위세법·민방위기본법·교육관계법 등 4대 전시입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고 7월23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을 개정해 교수 재임용 규정을 신설했다. 마침내 76년 2월28일자로 단행된 교수 재임용에서 그들은 416명의 교수를 탈락시켰다. 그들이 임의로 선정한 ‘문제교수’를 퇴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탈락한 교수 가운데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원으로 노명식·김용준·한완상·이우정·남정길·우창웅·성내운·윤식 교수 등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고난을 당하는 교수들 사이의 연대 움직임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교회의 형태를 취하는 방향으로 모색되었다. 문동환·안병무·이우정·이문영 교수 등이 앞장선 모색 과정에서 이들은 고난을 상징하는 성서적 지명을 택하여 ‘갈릴리교회’로 이름을 정했다. 집회 장소로 흥사단 소유의 대성빌딩을 쓰기로 하고 1개월간 사용 계약도 맺었다. 당회장직은 우선 당시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해영 목사가 맡았다.

 

75년 8월17일 오후 2시 대성빌딩에서 갈릴리교회 설립 예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기독자 해직교수, 구속자 가족, 동아·조선 해직기자 등 33명과 사복형사 및 기관원 9명도 동석했다. 그러나 두번째 예배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예배 장소가 봉쇄된 것이다. 이들은 근처의 음식점 한일관에서 두번째 예배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예배 장소를 물색한 끝에 이해동 목사가 시무하는 한빛교회에 비로소 안착할 수 있었다.

늘 감시 속에 열리는 갈릴리교회에는 20~30명이 모였는데, 주요 참석자는 기독자 교수들과 해직기자와 구속자 가족들이었다. 이처럼 갈릴리교회는 고난을 당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 갈릴리교회에는 집을 강제철거당하고 내쫓긴 빈민들, 억울하게 해고된 노동자들도 수시로 마음놓고 참석할 수 있었다. 점차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장소로 각인되었다. 뜻있는 사람들이 해방의 영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놀라운 신앙공동체였다. 78년 8월 창립 3돌 기념예배에서 문익환 목사는 ‘과부의 기도’를 주제로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웠다.

 

“기도란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이전에 불의한 지배자, 재판관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건 때려도 안 되고, 학교나 직장에서 쫓아내도 쓸데없고, 감옥에 처넣어도 그만, 죽인대도 막무가내로 붙잡고 늘어져서 귀찮아서라도 안 들어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믿고 이렇듯 끈질기게 몸으로 현실과 대결하는 일이라고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란 불의한 법관을 굴복시키는 끈질긴 힘이라고 하겠지요. 불의에서 정의를, 미움에서 사랑을, 절망에서 희망을, 거짓에서 참을, 추함에서 미를, 싸움에서 평화를, 저주에서 축복을, 어둠에서 빛을 끄집어내는 마술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기도는 불의한 재판관의 입에서 정의가 선포되게 하는 힘이지요, 쓴 샘에서 단물을 만드는 기적이구요….”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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