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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언덕에서 배운 것

양현모 2024. 7. 29. 18:05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 희 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음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 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