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가난은 친구
우리는 주위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 을 많이 보고 산다. 자기만 잘나갈 뿐 아니 라 자식들도 잘되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다니고 부와 권력과 사회적 명성도 누리는 사람들이다. 거기다 건강과 평화로운 가정생활까지 따라 준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하기야 이 후 자가 여의치 않아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제 법 많다. 외적 조건만으로는 누가 봐도 행복 할 것 같은데 건강이나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어 어두운 얼굴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위의 두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부러울지언정 존경심은 느끼지 않는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은 저나 나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부와 권 력을 순전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사용하 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우리가 마음 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좀 손 해 보면서,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 의 대상이 되지 않고 존경과 감동을 자아낸 다.
세상에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무 도 없다. 살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 람이 어디 있으며, 자신의 활동 무대이자 자 기를 키워 준 사회를 떠나 성공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람 가운데 제일 덜된 사람 은 혼자 잘나서 된 줄 알고 사는 사람, 은혜 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 수히 많은 가깝고 먼 인연에 의해 생긴다는 공과 무아를 가르치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범사에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말한다. 종교의 궁극 목적은 결국 자기 자신에 갇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 람을 이웃과 사회, 세계와 하느님을 향해 활 짝 열린 존재로 만드는 데 있다.
스리랑카의 저명한 민중신학자 알로이시우 스 피에리스는 가진 자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를 간단히 두 마디로 정의했다. '가난해 지기 위한 노력'(struggle to be poor)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노력'(struggle for the poor)이다. 전자는 자발적 가난으로서 개인의 도덕성과 영성의 문제이며, 후자는 사랑과 사회정의에 대한 헌신을 말한다. 살 면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말이라고 생각 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 노블레스 오블리주 를 조금이 라도 느끼며 사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 사회는 그만큼 모두가 함께 살 만한 사회가 될 것이다.
가난과 종교, 가난과 영성은 가까운 친구다. 둘이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신앙이 좋을수록 물질적으로 복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면, 그런 사람은 참다운 신앙과는 거리가 멀 다. 기복신앙이 우리나라 종교계를 지배하 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나라 종교들이 이 런 '복 장사' 하면서 재미 볼 수 있을지 의문 이다. 국민소득이 선진국 수준이 될 때도 여 전히 그럴 수 있을까? '복'을 구하는 마음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신앙 을 통해 얻고자 하는 복의 내용이다. 무엇이 진정한 복이며 진정한 행복인지를 올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이고 사 명이다. 그렇게 하지 않거나 못하는 종교는 존재하나 마나 한 종교일 것이다. 언제부턴 가 우리나라 대형 교회와 사찰과 종교 지도 자들이 가난과 너무 멀어졌다. 성직자들이 무소유로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당연 한데도 무슨 대단한 일인 양 매스컴에 보도 되고 세인의 이야깃거리가 된다. 성직이 출 세의 수단이 되고 신앙이 복덕 방망이가 되 어 버린 종교는 희망이 없는 종교다.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겸 심도학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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