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속도와 낮출 줄 모르는 성장에 갇혀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때야말로 수행과 혁명이 필요하다.
수행은 모든 생명이 함께하는 길 위에서 자신이 가진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꽃피우는 나만의 길이다.
진달래, 개나리, 장미, 호박꽃, 매화는 제각기 그들만의 이름과 향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꽃들의 향기를 탐하지 않는다.
참으로 오묘한 어울림이며 화음이 아닌가?
수행은 또 자신의 이름과 향기를 간직하고 뿜어내는 일이다.
이름과 향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지조'라고 이를 수 있다.
올곧게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켜내는 사람을 지사라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은 대나무와 매화 등 사군자에서 지사의 풍모를 찾았고, 뜰 앞에 그것들을 심어두고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자 했다.
매화를 노래한 시 중에서 나는 조선시대 신흠의 시를 좋아한다.
♧ "매화는 평생을 추위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는 구절에서 이 땅의 숱한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의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생각한다.
"풍란화 매운 향기 님에게 견줄쏜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위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가 만해 한용운의 지사적 삶을 풍란화에 비유하여 지은 추모시다.
매운 향기라니, 그렇다. 일제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곤궁과 고독의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간 만해의 모습은 칼날 위에 부는 훈풍이고 얼음 위에 핀 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 땅의 지식인과 정치인, 노동운동가 등 이른바 사회지도자들이 평소의 가치와 신념을 저버리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정반대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역사는 지조를 버린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간혹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보게 되는 종합편성채널에는 변절자들의 해괴하고 교묘한 논리가 판을 친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넘어 한없이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조용히 생각해본다.
왜 변했을까?
방법은 바꿀 수 있어도 길은 바꾸면 안 되는 것인데, 왜 자신이 평소 걸어오던 길을 바꾸었을까?
결코 놓을 수 없는 권한 행사,
더 풍족한 경제생활,
아니면 그보다는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조를 버린 그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그들은 믿음이라는 이름과 존경이라는 향기를 잃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변절자의 초라한 모습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매화는 그윽한 향기로 찾아왔다. 봄의 초입, 잠시 매화나무 앞에 서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한겨레 삶의 창) 법인스님의 봄날, 매화에대한 여러 생각 중에서-
♧나는 이 글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이 흐르는 물처럼 한결같지는 않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 순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이해 할 수없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뚜렷한 관점과 철학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자신의 색깔을 시시때때로 바꾸는 것은 비록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향기없는 불행한 삶임에 틀림없다.
다시한번 초심을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