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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을 품다!

양현모 2014. 8. 8. 21:54

 

 

 

 

 

 

 

 

백두산 가는 길

 

태풍 크라크와 함께 시작 된 하기휴가 ᆢ

 

태풍을 피해 도망치듯 비바람 몰아치는 거제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ᆢ

 

8월3일 06시30분까지 출국수속을 하기위해서 인천공항까지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ᆢ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ᆢ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활주로를 이륙하는 비행기를 1분에 한 대씩 아스팔트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을 향해 솟아오른다ᆢ

 

인천공항 사상 최대의 휴가인파라는 소식을 접했다 ᆢ

 

이륙하는 비행기가 많아서 중국 대련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약 한시간 정도 지연되었다 ᆢ

 

드디어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중국 대련공항에 도착했다 ᆢ

 

기온은 섭씨32도 ᆢ

무척 더운 날씨다ᆢ

 

공항으로 마중나온 24살의 어여쁜 현지 가이드를 만났다ᆢ

 

고향이 단동 이라는 유연연이라는 중국 아가씨는 일찍 결혼하여 26개월 된 아들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ᆢ

 

연변에있는 조선족 학교를 다녔고 ᆢ

단동이 북한과 인접해 있는 관계로 자신의 유창한 한국어 솜씨를 뽐냈다ᆢ

 

가이드의 안내로 대련 시내투어를 마치고 약 4시간 거리에있는 단동으로 이동했다 ᆢ

다음 날 단동에있는 압록강 주변을 여행하기 위해서다ᆢ

 

단동으로 가는 길은 반듯하고 질서정연하게 길이 나 있었으며 주변 풍경은 온통 옥수수 밭이다 ᆢ

 

8월4일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단동시내에있는 압록강 투어에 나섰다 ᆢ

 

압록강을 사이에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중국의 단동이 마주보고 있다 ᆢ

 

이곳의 국경지역은 철교가 이어져있고 북한과 중국의 무역이 자유롭게 교류 되고 있다 ᆢ

 

우리가 가게 된 곳은 앞록강단교!

 

6.25 당시 폭파되어 끊겨버린 앞록강 철교가 당시 전쟁의 처참했던 상황을 그대로 간직한채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비극의 현장으로 남아 있었다 ᆢ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우리나라 역사의 현장인 위화도 를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는 코스다 ᆢ

위화도는 고려 말 이성계가 당시 중국의 명나라를 공격하기위해 국경지역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공격 할 채비를 갖추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시기였다 ᆢ

 

하지만 고려 말의 정치상황이 명나라를 공격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 질 수있다는 정몽주. 정도전 등 충신들의 의견과 공격을 해야한다는 최영장군 등 왕권파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ᆢ

 

이에 이성계는 고민 끝에 명나라공격의 명령을 철회하고 군사를 돌려 철수하게 되는데ᆢ

 

이것이 그 유명한 위화도회군이다ᆢ

 

이런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니 당시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ᆢ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면서 목격 된 것은 강가주변 곳곳에 나와서 소와 염소를 지키며 힘없이 앉아있는 북한주민들의 모습과 아이들의 멱감는 모습들이다 ᆢ

 

우리는 반가워서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지만 그들의 귀찮은 듯한 힘없는 반응이 북한주민들의 삶과 실정을 가늠케 했다 ᆢ

 

우리 민족의 역사의 현장에서 동족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심정은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ᆢ

 

이어서 통화시에 있는 졸본성 박물관을 방문 했다 ᆢ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최초의 수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ᆢ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둔갑되어있는 현실이 괴로웠다 ᆢ

 

8월5일

 

드디어 백두산 올라가는 날!

 

새벽 5시30분 일찍 식사를 마치고 통화에서 5시간 걸리는 백산시를 경유하여 백두산 올라가는 정류장까지 이동했다ᆢ

 

백두산 올라가는 코스는 북파. 서파. 남파. 동파 네군데에서 올라갈 수있는데 동파는 북한에서 올라가는 코스이고 나머지 세군데는 중국영토에서 올라갈 수있다 ᆢ

 

우리는 서파코스를 통해서 백두산 천지를 등반하기로했다 ᆢ

백두산 버스 정류장에서 약 30 분 이동하면 백두산 천지로 향하는 1440계단이 나온다 ᆢ

 

백두산 가는 길은 구절초를 비롯해서 각종 야생화가 피어있는 길을 버스를타고 이동했다 ᆢ

 

1440계단이 보이는 곳에는 이미 수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ᆢ

 

우리는 계단을 통해서 백두산등반을 시작했다ᆢ

계단 중간에는 가마꾼들이 가마를 이용하는 등반객들을 태우기위해서 곳곳에 앉아있었다ᆢ

 

설마 이곳까지 온 사람들이 가마를 이용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ᆢ

 

곳곳에서 사람을 태우는 가마행렬이 목격되었다 ᆢ

 

장애인 이나 노약자들이 천지를 구경하기위해서 가마를 이묭하여 등반을 하게되는데 ᆢ

그비용이 만만치 않다ᆢ

 

계단수에 따라서 거리비용이 책정되는데 첫계단부터 시작하면 왕복 10만원이란다 ᆢ

중간중간에 피어있는 이름모를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ᆢ

 

24700m 높이를 알리는 표시판이 서있고 북한과 중국영토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었다ᆢ

 

머리가 하얀색이라서 백두산이고 ᆢ

백번올라가서 두번밖에볼 수없어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민족의 영산!

 

신이 도왔는가?

 

구름 한점없이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ᆢ

 

백두산천지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질러댔다 ᆢ

 

백두산 정상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ᆢ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좋은 곳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ᆢ

 

여기까지 왔는데ᆢ

백두산 인증샷을 찍는 것이 당연하다 ᆢ

 

사람들 중에는 신혼을 앞둔 예비부부한 쌍이 천지를 배경으로 웨딩사진 찍고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ᆢ

 

우리의 영토 ᆢ

민족의 영산 백두산정상을 돌고돌아서 밟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ᆢ

 

한라에서 박두까지 통일을 염원하면서 ᆢ

 

우리부부는 백두산 천지의 축복의 기운을 듬뿍받았다 .

 

8월6일

 

4박5일 마지막일정을 진행하기위해서 집안으로 이동했다 ᆢ

 

집안은 고구려(유리왕)의 두번째 수도가 있는 곳으로 광개토왕 비와 장수왕릉이 있는 곳이며 압록강을 사이에두고 북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있는 곳이다ᆢ

 

북한땅이 바라보이는 곳에 광개토왕릉과 광개토왕비석이 자리잡고 있어서 광개토왕의 북진정책을 실감 할 수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ᆢ

 

광개토왕비는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부친의 업적을 기리기위해서 414년에 세운 사면석으로서 높이 6.39m에 1775자를 새겨 그의 업적을 후세에 길히 남겼다 ᆢ

 

지금의 비석이 금이가고 글씨가 많이 지워져서 아쉽지만 탁본을 떠놔서 글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ᆢ

 

광개토왕 비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10분거리에 장수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ᆢ

 

장수왕릉은 집안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 중에 거의 완전한모습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돌무지 무덤으로 7단 피라미드형으로 축조되었으며 높이는 약13m로 동양 최대의 피라미드라고 한다 ᆢ

 

집안은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로서 그 위상을 떨쳐왔던 우리민족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ᆢ

 

시내로 이동하여 북한이 운영하는 모란봉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공연을 관람했다ᆢ

 

하지만 지금은 동북공정의 중국정부의 정책으로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둔갑되어버린 현실이며 ᆢ

분단된 조국의 현실 앞에 우리의 소중한 유적과 유물들이 중국의 문화로 선전되고있는 아픈과정을 지켜봐야했다 ᆢ

 

집안에서 단동으로 이동하면서 앞록강 건너편의 북한의 산하를 차창밖으로 내다보면서 북한이 자랑하던 수풍수력발전소의 모습도 스쳐지나갔다ᆢ

 

이번여행을 통해서 잊혀져가는 우리의 역사를 복원해야된다는 것과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다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