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현대자동차 노동조합 현장조직의 실태)
☞전현노, 현장연대, 민주현장, 민노회, 민투위, 평의회, 혁신네트워크, 현장투, 청노회, 민실협, 정도회, 형설회, 현연투, 범민련, 한빛, 실노회, 다미정, 현노투, 길아사, 민노투, 민실노, 노민추, 민노, 노발연, 노사랑, 현노신, 노연투, 한길투, 전민투, 현지사, 미래회, 자주회, 동지회, 전진회, 민혁투, ….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고 하도 많아 헷갈리기까지 하는 이 명칭들은 모두 현대자동차 내부에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했던 현장조직들의 이름이다. 각 조직들이 명멸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정확히 몇 개의 현장조직이 활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장조직 활동가들에게 물으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10여 개 정도 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물론 매년 그 10여 개 속에 포함되는 현장조직들의 이름은 상당히 달라지지만 말이다.
흔히 현장조직이라 하면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 내의 정파조직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 현장조직은 노동조합 집행권을 장악해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장조직들이 과연 정파조직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집행권 장악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면서 정치노선의 동질성과는 관계없는 이합집산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현장조직도 마찬가지다. 전국적 정파조직과 연계되어 활동하는 조직도 있고, 독자적으로 현대자동차 내부에서 활동하는 조직도 있지만 전국 정파조직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정체성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대조->대우조선 현장조직의 실태)
☞87년 노조설립당시 대우조선노조를 둘러싼 현장조직은 민주와 어용의 구분이 뚜렷한 상태로 출발했다. 초대집행부를 어용으로 규정하고 노조민주화를 기치로 "노민추"조직이 설립되면서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가 형성된것이다. 이로써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2대 최태환 집행부를 시작으로 7대 나양주집행부에 이르기까지 노민추 단일조직의 장기집행시대가 열리게 된다. 물론 민주노조를 탄압하기위한 회사의 다양한 전략들이 시도되면서 폭력사태가 발생되고 이과정에서 많은 동지들이 불구가 되기도하고 평생 치유되지않을 상처를 가슴에 안은채 살아가고 있다. 또한, 구속과 해고를 당하면서도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어졌고, 이과정에서 다섯분의 열사가 악명높은 대우조선 자본에 항거하며 소중한 젊음을 불살랐다.
현자->이름 외우기도 벅찬 현장조직들) ☞현재 현대자동차 현장조직 중 규모나 영향력 등을 감안할 때 이른바 메이저 조직이라 부를만한 것은 모두 다섯 개다. 우선 전국적 정파 분류의 큰 틀 속에 포함될 수 있는 세 조직이 있다. 국민파의 범주에 들어가는 민주현장(민주현장투쟁위원회), 중앙파 성향의 민노회(민주노동자회), 현장파 경향성의 민투위(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가 이들 조직이다. 민주현장은 정갑득 금속노조 전 위원장, 민노회는 박유기 금속노조 현 위원장, 민투위는 이상욱 9, 11대 위원장 및 지부 1대 지부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한빛(한빛노동자회)-노연투(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현장연대(현대자동차 현장연대)로 이어지는 보수파 혹은 실리파의 대표조직이랄 수 있는 현장혁신연대(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현장혁신연대)가 있다. 대표 인물은 최근 세 차례 선거에 출마한 홍성봉 씨다. 실리파의 다른 한 축은 전현노(전진하는 현장노동자회)다. 현장연대에서 분화해 규모는 작지만 현 이경훈 지부장을 중심으로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다.
현대차노조에는 현장조직 의장단회의가 있는데 이 회의의 구성원은 앞서 언급한 다섯 조직에 평의회(현장노동자평의회)가 포함된다. 평의회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좌파 블록으로서의 선명성을 바탕으로 각종 사안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의장단회의에 포함되는 이들 조직 외에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을 중심으로 제2민주노조운동을 주창하는 혁신네트워크, 그리고 좌파 블록의 현장투, 청노회 등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장단회의에 참여하는 현장조직들을 정치노선에 따라 분류하자면 왼쪽부터 평의회-민투위-민노회-민주현장-현장혁신연대/전현노로 표시할 수 있다.
대조->대우조선 노조의 개량화와 현장조직의 분열)
☞90년초 제3대 백순환위원장 집행당시 골리앗투쟁이 마무리 되자마자 대대적인 구속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소위 골리앗전사로 불리우는 골리앗투쟁을 전개했던 동지들과 각종 집회시 집회의 열기를 북돋으며 선전선동에 앞장섰던 풍물패와 문화선동대 동지들에 대한 회사의 집중탄압과 분열전략이 시작됐다. 그리고 당시 노민추 동지들에 대한 노동통제전략과 동시에 회사의 희망90운동을 앞세운 신경영전략이 현장을 장악하게 되었고, 노동조합은 차츰 자본이 원하는 방향대로 개량화 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을 선도했던 노민추 조직내에 분열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비타협적노사관계를 내세운 현민투조직이 탄생하면서 노민추조직은 현장조합원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되고, 현민투가 집행부를 장악하게 된다. 현민투집행부의 등장은 노민추집행부의 개량화 에 대한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자본과 대립각을 세우며 노조운영을 전개했으나, 4,4사태에 대한 회사의 치밀한 탄압전략에 유연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인력부사무실 점거투쟁과정에서 집행부전원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후 집행부의 구속사태와 임단협투쟁의 난항으로 비타협적 노사관계에 대한 현민투의 실험은 끝을 맺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은 현민투조직이 가지고 있는 깨끗하고 강한이미지를 선호하고 있다. 다만, 전략적인 부분에서 현장의 염려스러움만 해소한다면, 대우조선의 민주노조운동을 선도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세력임을 부인할 수없다.
현자->민실협-민실노-한빛, 현장조직의 기원) ☞현대자동차에 현장조직이 생긴 것은 88년의 일이다. 87년 민주노조 설립 준비를 하면서 임시 집행부에서 위원장을 맡았던 이상범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이 정작 그해 9월 1대 선거에서 이영복 그룹에 패배하면서 88년 9월 민실협(민주노동자실천협의회)을 발족시킨다. 하부영, 전한수, 하인규 등이 중심이 된 민실협은 89년 2대 선거에서 이상범을 위원장에 당선시킨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민실노(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다. 김강희, 정갑득 등이 주축이 된 민실노는 ‘학출’들이 조직에 관여했고 민실협에 대해 너무 유연하다고 비판하면서 강성 이미지를 구축하고 2대 선거에 김강희가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1대 위원장이 된 이영복은 집행부를 중심으로 한빛(한빛노동자회)을 결성하고 이후 6대 선거까지 여섯 차례 연속 출마한다.
이후 민실협이 이상범 중심 조직이 되면서 하부영, 홍영출 등이 민실협을 나와 노사랑(노동조합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이상범, 김재근, 김회영 등은 92년 현노신(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을 창간한다.
한빛은 6대 선거까지 이영복을 중심으로 움직이다가 이영복의 퇴사 이후 이경훈을 대표 얼굴로 한 노연투(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로 전화했다. 노연투는 7대부터 12대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이경훈을 위원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모두 실패했고, 2006년 홍성봉을 새로운 얼굴로 해서 현장연대로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현장연대는 지부 3대 선거를 앞두고 민혁투 일부와 합쳐 현장혁신연대로 바뀌었다. 이 때 이경훈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은 현장연대를 나와 전현노를 결성했고 3대 지부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대조->실노추 집행부의 등장과 한계)
☞현민투집행부의 실정을 틈타 10대 노민추 김국래집행부가 들어섰으며, 근로조건저하없는 주5일근무를 쟁취하는 등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9대 현민투 집행당시 '근골격계 질환'에 대한 직업병인정투쟁의 성과로 현장의 많은 조합원들이 산재판정을 받게되면서 근로복지공단과 자본측의 집요한 공세가 시작되고 10대집행부는 자본이 요구한 "적정요양기간 설정"에 동의하게 되고, 이에 반발한 현장조합원들과 현장조직들의 견제와 여론에 밀려서 제11대 실노추 집행부가 등장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실노추조직의 탄생은 그동안 끊임없이 위원장선거에 출마해왔던 이세종씨 인물중심의 조직이었다. 특별하게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했다고 볼수는 없지만, 7번이나 위원장에 출마한 경력이 있었던 이세종씨의 인지도가 노민추조직의 장기집행에 피로감을 느낀 조합원들이 "이제는 이세종씨도 한 번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민주와 어용의 차별적 노조운영이 퇴색된 가운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분석된다. 실노추 집행부의 등장은 상집위들의 경험부족과 관점부족으로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게되고, 이런 실노추 집행부의 실책을 놓치지않은 현장조직들의 집요하고 강도높은 비판과 견제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노추 집행부는 06년임단협투쟁에서 임금과 복지부분의 질을 상향시키는 괄목 할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또한, 사전매각대응을 통한 현장의 신뢰를 확보했으며, 조합원의 고용확대정책을 통해 정년연장과 신규채용확대, 퇴직자프로그램신설, 비정규직 정규직전환확대 정책을 전개했고, 집행초기 실책을 만회하면서 12대 임원선거에 당선되어 노동조합을 연속으로 운영하게 된다.
하지만, "구르지않는 돌은 이끼가 낀다고 했던가?" 나름대로 결속을 유지하면서 갈등을 해소했던 실노추집행부에 균열이 발생하게 되고, 사람중심의 파벌이 형성되고, 권력투쟁의 양상이 전개되면서 현장조합원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노조운영을 하게 된다. 노민추조직에서도 발생했던 사항들이 여지없이 실노추조직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의 허물은 쉽게 보면서도, 자신의 허물은 보지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어둠의 세상인것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실노추집행부는 이세종씨라는 인물중심으로 시작해서 이세종씨 3선 도전으로 종지부를 찍게된다. 이렇듯 인물중심의 조직운영은 실노추조직의 핵분열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특정 인물중심의 조직운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희망 연대와 통합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자->선거 때마다 달라지는 현장조직들) ☞91년 3대 선거부터 민주파는 뭉치기 시작했다. 91년 명지대생 강경대의 사망으로 촉발된 노태우 정권에 대한 항거 과정에서 대규모 구속, 수배 등 공안정국이 형성되면서 3대 선거에는 현연투(현대자동차연대투쟁위원회), 4대에는 범민련(범민주투쟁연합회) 등이 후보를 내 당선시켰다.
5대 선거에서 다시 한빛 이영복 후보가 당선된 후 6대 선거를 맞아 민주파는 민투위(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당시 민투위에서 정갑득 위원장과 이영희 부위원장, 현노신에서 주용관 수석부위원장, 이성근 부위원장을, 노사랑에서 하부영 사무국장을 내는 선거연합으로 당선됐다.
따라서 현재 존재하는 현장조직 중 가장 오래된 것은 95년 출범한 민투위다. 하지만 당시 민투위는 지금의 민투위에 비해 훨씬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었다. 7대 김광식 위원장 시절, 6대 집행부를 구성했던 정갑득 등이 민주노총 초대 권영길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이 주창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을 내세우며 민투위를 나와 실노회(현대자동차 실천하는 노동자회)를 결성했다.
실노회는 이후 국민파 그룹을 대표하다가 8대 정갑득 위원장 시절 터진 광고비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의 갈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적 조합주의를 지향하는 실노회와는 달리 반제, 자주, 반미에 중점을 둔 그룹들이 2001년 자주회(현장활동 혁신을 위한 자주노동자회)를 결성하면서 갈라섰다. 국민파 전국 조직인 전국회의 소속의 두 현장조직으로 존재하던 실노회와 자주회는 2007년 민주현장으로 다시 뭉쳤다.
민노회는 2005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7대 김광식 위원장이 민투위 소속으로 당선된 이후 현장조직인 민투위와 집행부가 된 김광식 위원장 사이에 상집 인선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고, 결국 7대 집행부를 중심으로 민투위를 탈퇴하고 미래회(미래를 여는 노동자회)를 결성한다. 미래회는 현지사(현장을 지키는 사람들), 현노신과 통합해 민노투(평등사회를 건설하는 민주노동자투쟁연대)를 발족시키고 10대 위원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민노투에 합류했던 구 미래회 그룹과 현대정공 출신 중심의 동지회(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동지회)가 합쳐진 것이 민노회다.
대조->현장연대의 등장과 활동방향)
☞지금의 현장연대는 기존의 희망연대와 실노추가 통합해서 만들어진 현장조직이다. 희망연대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바로 특정인물중심의 실노추조직운영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통합 전 희망연대의 모습도 성만호라는 특정인물중심으로 모든조직운영이 집중되고 있다. 통합을 통해서 인물중심의 조직운영의 틀이 약간 퇴색되기는 했지만, 실노추 조직운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와 활동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14대 임원선거에서 가장 한발짝 앞서가고 있는조직을 꼽으라면, 현장연대다. 이런 결론은 현장연대가 조합원들의 지지를 받기때문이 아니라, 현 노민추집행부가 현장의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이유는 작년 임금동결의 불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올해 전임자급여문제를 둘러싼 집행부의 거짓말이 들통이 낳기 때문이다. 이런 집행부의 실정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대응하고 있는 조직이 바로 현민투조직이다. 하지만, 현민투조직의 투쟁도 현장에서 볼 때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현장연대는 유인물투쟁마저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몰라도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한마디로 모초럼 찾아온 호재를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것이다. 굳이 평가한다면, 현장연대는 주도적인 집권전략에 의해서 차기임원선거를 노리는 것이아니라 현집행부의 실정을 통한 어부지리라는 소극적이고 노동운동의 관점이 결여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우조선노동조합도 이번에 친 회사 성향의 '노개연'조직의 당선이 가능해 질수 있다. 노민추조직이 잿밥이되고, 타현장조직들의 소극적인 활동이 민주의 잣대로 볼수없는 어용의 잣대로 14대 임원선거 판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현자->현장조직과 집행부 관계도 갈등 요인)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현장조직들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이합집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합집산은 선거와 연관돼 있다. 집행권 장악을 위해 뭉쳤다가 흩어지고, 다시 다른 조직과 합쳐지기를 반복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현장조직들이 대외적으로 표명했던, 혹은 기존에 가져왔던 노선들이 희석되기도 한다. 11대 선거를 앞두고 실노회와 노연투가 선거연합 논의를 하면서 그간 ‘어용’의 테두리에 갇혀 있던 노연투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물론 다른 민주파 현장조직들은 실노회를 맹비난했지만 ‘어디도 노연투와 연합하려 했다더라’ 등의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이런 과정이 3대 지부장 선거에서 이경훈 지부장의 당선이 가능하도록 한 밑바탕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장조직과 집행부 간의 갈등도 여러 현장조직들이 생겨난 원인 중 하나다. 7대 집행부 당시 당선자를 낸 민투위와 집행부 사이에 갈등이 생겨 결국 당선자를 배출한 조직에서 불신임 운동을 벌였다. 지부 2대 윤해모 집행부 역시 소속 조직인 민투위와의 대립으로 집행부가 사퇴하기도 했다. 즉 현장조직에서는 집행부를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조직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고, 집행부는 대중조직의 책임자들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려 하면서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현장조직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조직들이 합쳐졌다가 나눠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은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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