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민주화

카다피는 물러가라!!!

양현모 2011. 3. 2. 20:23

카다피는 물러가라!!!

 

 

 

 

 

 

 

 

 
한겨레 프리즘] 석유가 삼킨 50년 / 김영희
김영희
국제뉴스팀장
한겨레 김영희 기자기자블로그
» 김영희
“미스터 프레지던트, 당신의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어/ 사람들은 쓰레기를 먹고 있어/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봐/ 온통 고통이야, 미스터 프레지던트/ 나는 두려움 없이 말해/ 내가 곤란에 빠질 것을 알지만 말야/ 어디서나 불의가 보여.”

지난해 말 22살짜리 튀니지의 래퍼 하마다 벤 아모르(일명 엘 제네랄)가 부른 노래는 튀니지를 넘어 올해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광장, 바레인 마나마의 진주광장에 모인 젊은이들의 투쟁가가 됐다. 힙합에 실린 아랍 젊은 세대들의 분노는 불의와 부패, 민주주의의 부재를 향해 있다. 서구에서 자주 인용된 2003년 브루킹스연구소의 아랍 젊은이에 관한 보고서가 현실에 절망한 이들 세대에 “반미와 이슬람급진주의가 근본가치가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것과는 번지수가 다르다. 그렇다고 미국식 자유주의의 확산을 뜻하는 ‘프리덤 어젠다’의 승리도 아니다. <알자지라>는 이 지역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해온 대표적인 국가 이집트와 튀니지의 변화는 ‘반신자유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적어도 아랍의 변화가 반세기 넘게 국제사회 ‘석유의 욕망’에 눌려왔던 이 지역 사람들의 기본권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945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 아지즈 사우드 국왕과 “미국이 사우디 석유에 대한 특혜적인 접근을 허가받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 왕조를 안팎의 도전으로부터 지켜준다”는 데 합의했다. 중동지역 왕조들과 비슷한 합의가 잇따랐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지난 50여년간 이 지역이 전세계, 특히 미국에 ‘거대한 주유소의 집합’이었다고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사우디 주유소, 쿠웨이트 주유소, 바레인 주유소, 이집트 주유소, 리비아 주유소 등등을 향한 우리의 메시지는 일관됐다. ‘여기 딜이 있다. 계속 펌프를 열고 기름값을 낮추고, 이스라엘을 너무 심하게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너희 안에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국민들의 인권을 빼앗든, 얼마나 부패하든, 여성들을 계속 문맹에 빠뜨리든, 젊은이들의 교육을 외면하든.’”

자, 서구 제국주의를 맘껏 비판하자. 그렇다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걸까?

1970년대 이래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한국에 돈 벌어주는 국가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국교 단절을 선언한 페루나 독자 제재에 들어간 오스트레일리아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정부는 리비아 상황에 대한 우려 성명 하나 내지 않고 있다. 언론은 상황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릇된 인식을 부추긴다. 카다피의 석유시설 사보타주 지시설은 “폭발 지시”로, 이슬람사원 첨탑에 일부 용병들이 대공화기를 쏘았다는 외신은 “미사일”로 부풀려졌다. 우리 언론들 보도대로라면 리비아에서 결전은 이미 몇차례쯤은 끝나야 했다. 서구 언론에 대한 높은 의존도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문제는 외국 언론의 지엽적이고 불확실한 일부 묘사를 과장하는 우리 언론의 선정성과 조급증이다. 이렇게 아랍의 상황을 ‘선악의 단판승부’로만 본다면, 지금부터 아랍이 밟아야 할 혼란과 고통, 지난하고 복잡한 과정을 우리는 영영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중동지역까지 들썩거리며 3차 오일쇼크 가능성이 구체화될수록 이런 양상은 더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수십년간 석유가 삼켜온 아랍의 기본권을 더이상 국제사회는 억누를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석유값 급등엔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 신흥국의 석유소비 급증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현실 또한, 힘들더라도 외면할 순 없다. 지금이 기회라면, 오일쇼크마저도 지구촌이 견딜 가치가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열린 리비아 연대 시위

“살인마 카다피, 물러나라!”

2011년 2월 25일, 아랍인 1백여 명과 이들을 지지하는 다함께와 나눔문화 회원들 20여 명은 이태원 이슬람 사원 앞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리비아 독재자 카다피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리비아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주한 리비아 대사관에 혁명 지지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위대열은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이태원 한복판부터 리비아 대사관까지 행진했다. 

△리비아 민중의 승리를 바라는 집회 참여자들이 이슬람 사원에서 리비아 대사관까지 행진하고 있다. ⓒ사진 최인찬

카다피의 무차별 학살극에 분노한 리비아인들이 이번 집회를 주최했다. 집회 참가자인 리비아인 아흐메드는 “카다피가 리비아의 동포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나 가만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집회 신고를 내고 행진을 주도한 모하메드는  “카다피가 자국민을 학살하려고 일당 5천만 원을 주고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토했다. 

"살인마 카다피, 물러나라!" 2월 25일 오후, 한국 리비아 대사관 앞에서 리비아 민중의 승리를 바라는 아랍인과 다함께,나눔문화 활동가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최인찬

이날 집회에는 리비아인 외에도 많은 아랍인이 참가했다.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 퇴진 요구 시위에 참가했던 이집트인들의 얼굴도 보였다. 한 이라크인은 “후세인 독재 아래 고통받아 리비아들의 심정이 어떨지 잘 알기 때문에 집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한 수단인 참가자는  “수단은 리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기에 남의 나라일 같지 않아” 집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모로코인 토니는  “자국민을 대량 학살한 카다피는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나중에 ‘진귀한’ 광경을 볼 수 있었는데, 리비아 대사관 근처에서 집회를 벌이던 중에 우익 단체인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회원들이 카다피 규탄 기자회견을 한다며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리비아 학살을 규탄하기 위해 모였다 말했지만 막상 기자회견의 내용은 대단히 문제가 많았다. 

예컨대, 그들은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발이 묶여 리비아에 군대를 보낼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민주주의’ 나라가 대신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름으로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가 1990년대부터 벌인 학살 전쟁을 리비아에서 재연하자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른바 ‘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는 이명박 대통령이 할 일에 관해 이들은 뭐라고 말했을까?   “특전사 출신들을 모아 파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리비아인 참가자들에게 이런 내용을 통역해 말해 주자, 이때까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회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던 리비아인과 다른 아랍인 참가자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우익 단체들의 발언을 가로막고 그들이 들고 있던 플래카드를 걷어 버렸다. 

△카다피의 학살에 분노한 아랍인들이 카다피 퇴진을 요구하는 사진팻말의 카다피 얼굴을 짓밟고 있다. ⓒ사진 최인찬

당황해서 쩔쩔매는 우익 단체 인사들에게 다함께 회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라. 예전에 전투기 폭격으로 리비아인을 학살했던 게 바로 미국”이라고 항의했다.

한 리비아인 참가자는 확성기를 들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또 다른 침략 전쟁을 요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리비아의 문제는 리비아 민중이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연대를 환영하지만 군대를 환영하지는 않는다.”

모하메드는  “상황이 유동적이고 한국에 거주하는 리비아인들 중 상당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리비아로 돌아가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또 한 번 집회를 열 것”이라고 투지를 다졌다

 

 

[핏빛 리비아] 리비아 ‘민주화 영웅’ 파티 테르빌은?

파티 테르빌(39·사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42년 철권통치를 흔들고 있는 리비아 반정부 시위의 중심에 그가 있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엔 분신한 노점상이, 이집트 시민혁명엔 구글 임원이 있었다면 리비아에는 테르빌이 있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이다.

테르빌이 명성을 얻은 건 1996년 수도 트리폴리 인근의 아부 슬림 교도소에서 발생한 폭동사건을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불과 2∼3시간 만에 1200여명의 수감자가 정부의 유혈진압으로 사망한 것을 지켜보면서 인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 그의 형제 등 가족 일부도 이 사건으로 숨졌다.

그는 그동안 반체제 활동으로 일곱 번이나 감옥에 가야 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사퇴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 15일 리비아 보안군에 의해 또다시 연행됐다. 그의 체포 소식을 들은 '아부 슬림 폭동' 유족들은 이날을 '분노의 날'로 선언하고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테르빌 석방을 촉구하며 경찰서를 급습하고 광장을 점거했다. 그것이 리비아 반정부 시위의 시작이었다. 테르빌은 16일 새벽 풀려났으나 시위대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테르빌은 27일 야구모자와 카피예(아랍 남성들의 머리두건), 운동화를 착용한 채 가진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것이 혁명의 유니폼"이라며 "그(카다피)가 공정한 법정에서 정의를 마주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카다피가 살아서 체포되길 희망하지만 생포가 불가능하다면 죽어서라도 권좌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