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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사망, 3~4년만 넘기면 '기회' 온다

양현모 2011. 12. 19. 22:40

김정일 사망, 3~4년만 넘기면 '기회' 온다

[주장] 김정은 체제,

통일에 도움될 수도... 남한 차기정부가 중요하다

김갑수 (kim gabsoo) 기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7일 오전 8시30분 과로로 열차에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9일 보도했다. 사진은 지난 11월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 위원장의 조선인민군 제789군부대 시찰모습.
ⓒ 연합뉴스
김정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거는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만들어진 한반도 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전후 한반도에서 구축된 '김일성-이승만·박정희'의 냉전체제가 제1기였다면, 6·15 선언을 도출한 '김대중-김정일'의 화해체제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측의 김대중에 이어 북측의 김정일까지 유명을 달리함으로써 2기 화해체제에 완전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향후 제3기 체제가 어떤 모습으로 형성될 것인가다.

 

한반도의 제3기 체제는 1기는 물론 2기보다도 한층 진전되는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진전'이라 함은 '민족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는 바람직한 진행'을 의미한다. 김일성과 이승만·박정희는 전쟁 직접 체험세대, 김대중과 김정일은 전쟁의 추체험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북한에 새롭게 등장할 김정은과 2012년 남한에서 탄생될 신정권은 완전한 전후세대가 될 것이다.

 

향후 지구촌은 냉전체제로 돌아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주의가 복고되어야 할 터인데 21세기의 지구촌에서 왕년의 영·불·독·이·러·미 중의 어느 한 나라만큼이라도 국제무대에서 무례하게 발호할 저력을 가진 나라는 없다. 아니 더 이상 순순히 피지배를 허락할 약소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향후 지구촌은 최소한 군사적으로는 화해와 타협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와 냉전체제의 종식, 문제는 향후 3~4년

 

북한 통치자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한반도 정세를 순식간에 짙은 농무(濃霧)로 흐려놓은 것 같지만 기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그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저간에 드리워져 있던 농무를 희석시킬 가능성이 높다. 고비는 향후 3~4년에 있다. 2015년은 김일성이 북한의 정권을 잡은 지 70년째가 되는 시점이다. 그의 손자인 북의 김정은과 남의 차기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는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낙관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북에서는 김정은 체제가 무리 없이 자리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남측에서는 온갖 추측과 예상이 난무했지만 어느 것 하나 들어맞은 것이 없었다. 이후 후계자 김정일 체제는 17년간이나 온존했다. 하물며 김일성의 죽음에 비하면 이번 김정일의 죽음은 덜 충격적이다. 그의 건강 이상설이 나돈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며, 아들 김정은에 의한 후계체제도 이미 공식화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과도한 추측과 냉전·수구적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한 관측은 퇴행적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일단 우리는 동족 지도자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시하는 예의와 아량을 보여야 한다. 정부에서는 속히 조문단 파견(또는 조의 표명)을 추진하는 일 말고는 딱히 할 일도 없다고 말한다면 무조건 불온하면서도 안일한 태도일까?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한 북한의 '특별 방송'에서도 "우리는 김정은 동지의 령도에 따라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오늘의 난국을 이겨내 주체혁명의 위대한 새 승리를 위하여 더욱 억세게 투쟁해나가야 한다"고 보도했으며, "혁명의 길은 간고하고 조성된 정세는 준엄하지만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현명한 령도 따라 나아가는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을 힘은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다. 예상대로 김정은은 장의위원의 제1번 서열에 올랐다. 

 

동요 없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후계 체제

 

이런 사실들은 북한의 후계체제가 동요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아니 벌써 이루어졌다고) 보게 만드는 유력한 징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집권세력은 자기들이 흩어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더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 과정에서 군부의 신뢰를 받는 장성택은 조카 김정은을 뒷받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후인 17, 18일에도 미국과 핵협상을 벌이며 얻어낼 것을 다 얻어내는 침착함을 보였다.

 

김정일이 추구했던 선군정치와 강성대국론의 기조에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여전히 중국과 혈맹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돈독한 동맹국 지도자의 서거에 예의를 갖추어 북한이 발표하는 소식만 전할 뿐 어떠한 논평도 삼가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남한은 북한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이지만 북한을 잘 모르는 권력자와 국민이 득실거리는 나라다. 남한의 국정원은 지척의 지도자가 죽은 이래 3일 동안이나 그의 죽음을 인지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는 조금 멀리 볼 때 결국 낙관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은은 완벽한 전후세대다. 그의 주변은 젊고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 또는 보강될 것이다. 그가 대중·대미관계와 핵문제 그리고 대남 화해 등에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임기가 1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이명박 정부지만 김정은이 보다 전향적인 운신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해 줄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남한의 차기 집권 세력

 

  
북한 조선중앙TV가 지난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차에서 현지지도 중 과로로 사망했다고 보도한 가운데,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TV 모니터를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뉴스속보를 지켜보고 있다.
ⓒ 유성호
김정일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한의 차기 집권세력이 누가 되느냐에 있다. 북한에 신세대(?) 권력이 들어섰듯이 남한에도 전쟁이나 냉전과는 무관한 시민세력이 등장해야 할 이유가 한층 분명해졌다. 남한의 차기 집권 세력은 친일은 물론 '과(過)친미'와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세력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종북이나 반미 세력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아무튼 차기 집권 세력은 수구적인 친일세력과 아주 무관하고 과거의 대미 종속성에서도 자유로운 세력이어야 미국과 보다 진전되고 건전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가 있다.

 

9·11 테러와 미국 발 금융위기는 미국의 패권을 선명하게 균열시켰다. 이제 다수의 미국인은 자국의 세계 패권이 붕괴되는 것을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인도 수용하는 미국의 후퇴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 세계 유일 집단이 바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다. 미국의 후퇴와 함께 나타난 유럽의 위축, 일본의 쇠락이 아니더라도 중국의 부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확신하건대 남과 북의 새로운 집권 세력이 주체적으로 화해를 도모하고 아울러 미국과 중국을 동시에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통일은 결코 요원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는 한반도의 평화를 진전시키고 남과 북을 통일로 근접시키는 명백한 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그러길 기대한다.

 

 

“통 큰 지도자” “무능한 권력자”

     극과 극 평가

출생부터 사망까지
20살 노동당 입당·33살때 후계자 확정
김일성 사망뒤 ‘선군정치’ 강성대국 도모
핵 억제력 싸고 미국과 벼랑끝 힘겨루기
2차례 남북정상회담 하며 돌파구 모색
한겨레 정의길 기자기자블로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 자리에서 “나를 은둔생활한다고 말하는데…이번에 김 대통령이 찾아오셔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신에 대한 압축적 평가이다. 그에게는 언제나 상반된 두 가지 시각과 평가가 존재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력에 오른 무능한 2세 혹은 권력의지를 가진 유능하고 냉혹한 권력자, 합리적이고 통 큰 지도자 아니면 즉흥적이고 방탕한 권력자, 북한을 아사 직전의 위기에 빠뜨린 무능한 권력자 아니면 위기의 북한을 ‘고난의 행군’으로 생존시킨 지도자라는 극단적 평가가 엇갈렸다.

그의 출생부터가 논란거리이다. 그는 북한 공식 발표로 1942년 2월16일 김일성 전 주석의 항일무장투쟁 근거지인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다는 귀틀집은 혁명사적지로 지정됐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은 그가 김 전 주석의 항일투쟁을 이어받았다는 정당성을 위해 조작된 것이라는 반론이 남쪽에서는 대세다. 그는 김일성 전 주석이 소련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주장된다.

해방이 되자 그는 김일성 전 주석이 소련군과 함께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 김정숙과 항일 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들어왔다. 평양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다가 한국전쟁 당시인 1950∼52년 중국 지린학원에서 유학했다. 1960년에는 김일성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61년 20살의 나이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당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등에서 지도자 수업을 닦는 길로 나섰다.

북한의 공식 출판물들은 당연히 그를 유년 시절부터 극찬한다. 전 과목 우등 등 탁월한 학업성적과 지도력, 다양한 독서와 취미활동 및 봉사활동 등뿐만 아니라 ‘보통 어린이들이 쓰지 않는 복잡하고 미묘한 어감의 말을 잘 사용했다’고 평가한다. 반면 그의 성격이 괴팍하고 즉흥적이고, 능력도 보잘 것 없다는 주장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등 망명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전한다. 황장엽은 자서전에서 그가 “김정일은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으며, 아내는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김정일을 좋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잡하고 어려운 책은 원래 참을성이 없는데다 탐구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며 학교성적은 중간쯤이었다”고 폄하한다.

엇갈린 주장과 평가 속에서 공통분모는 있다. 그가 집중력과 몰입력이 높으며, 일단 한 문제에 집중하면 의사결정이 단호하고 파격적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의 이런 자질은 호사가적 기질로 발휘되어, 밤을 새워 일을 한다거나, 문학예술에 대한 재능과 관심을 보여왔다. 사생활도 그의 이런 기질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한국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했고, 계모와 이복형제와의 권력투쟁설도 있다. 김 위원장은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했고, 성혜림은 모스크바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는 등 여성 편력과 사생활은 그를 비난하는 대목이지만, 그의 사생활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을 둘러싼 최대 쟁점은 그의 권력 승계이다. 북한의 <조선전사 년표2>를 보면, 그는 1964~66년 사이에 김 전 주석을 집중적으로 수행해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1967년부터 69년까지 과도기를 거쳐 1970년대 독자적인 지도활동에 들어갔다고 북한 연구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분석한다. 또 그가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공식후계자로 공식 승인됐다는 것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그가 이 과정에서 반김일성 인물들을 적발해 숙청하고, 특히 이복형제와 작은아버지 김영주까지 권력투쟁을 통해 제거했다고 남쪽의 보수적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또 영화 등 예술부문 등 선전부문을 담당해, 김일성 항일투쟁 부각 등 김일성 유일지배체제를 다지는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런 남쪽의 보수적 연구를 원용한다고 해도, 김 위원장이 자신의 지위를 공공히 하며 후계자로 입지를 다지는 능력을 보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북한 연구자들은 김 위원장이 후계자로서 권력을 장악한 것은 김일성의 의지, 김정일의 능력, 빨치산 원로들의 추대라는 세가지 힘이 작용했다고 의견을 모은다.

김 위원장은 74년 당대회 이후 주체사상 확립과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지며, 내치에서도 증산 캠페인과 대중 동원을 이끌며 경제 분야에도 관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를 통해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됐고,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해 권력승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994년 7월8일 한반도 핵위기 와중에서 김일성 당시 주석이 사망하면서 ‘위기의 북한’을 걸머지게 됐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이 시기는 북한에 건국 이후 최악이었다. 그는 군부가 중심이 된 ‘선군정치’로 위기 타개에 나섰고, 과감한 대외관계 개선에 나섰다. 1994년 북미기본합의, 김대중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2000년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에 이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추진과 북미수교 추진 등으로 북한을 개방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갔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10.4남북정상회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종전선언 추진 등으로 다시 한번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평화정착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평화정착은 주변국들의 정권교체에 따른 대북한 정책 변경과 북한의 핵문제로 번번이 좌절됐다. 북한이 끝까지 핵개발을 담보로 잡고 포기하지 않은 것이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은 대외정책도 대결과 화해라는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두 개의 칼을 들고 북한을 이끌었다. 결국 그는 남쪽의 이명박 정부 이후 남북관계 경색 속에서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외관계가 봉쇄된 채 자신의 지도봉을 내려놓았다. 김 위원장이 북한이 여전히 고립과 봉쇄된 가운데 사망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향후 북한과 그의 후계 체제의 몫으로 남겨지게 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