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

안식일과 해방

양현모 2010. 8. 1. 14:17

        

안식일과 해방

(눅 13:10-17)

 

    18년 된 여자 꼽추 이야기

     예수님은 당시에 유랑 랍비처럼 활동하시면서 틈틈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 자리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18년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면서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속칭 꼽추라고 부릅니다. 성서기자는 이 여자가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다. 고대인들이 질병을 귀신들림 현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병리적인 현상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런 몹쓸 병에 걸렸는지는 성서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몇 살이나 되었을까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면 지금 꽃 같은 열여덟 살입니다. 아기를 낳다가 이런 병을 얻었는지, 시집살이에 지쳤는지,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는지 궁금하지만, 성서는 말이 없습니다. 18년 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병을 앓고 있는 이 여자는 사람대접도 받지 못했겠지요. 이럴 바에야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길만합니다. 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골방에 숨어서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왜 이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이런 불행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말문이 막힙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억울한 죽음도 많고, 억울한 재난도 많습니다.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어린아이들이 당하는 고난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병원 신세를 지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심각한 장애도 많고, 소아암에 걸린 아이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면서 동시에 전능하다면 왜 이런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무죄한 이들의 고통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20세기 후반에 세계 신학의 화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기도가 가능한가?” 구약성서도 이런 질문을 합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이 순식간에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자식들이 다 죽고, 재산도 없어지고, 몸은 견딜 수 없는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기와로 자기 몸을 긁으면 한탄했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다시 축복하시어 이전보다 더 많은 자녀들과 재산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42장에 담고 있습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직접 이런 불행을 당했습니까?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분은 없나요? 거꾸로 이런 불행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려서 만족스럽다고 말입니다. 그런 불행이 닥칠까 염려하느라 한 순간도 평안하지 못한 분들도 있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열심히 살기만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떤 자리에 있든지 여러분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18년 된 여자 꼽추 이야기를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인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분 가족이나 손자나 그 후손 중에서 이런 운명에 처한 이들이 분명히 나올 겁니다.

 

    두 시각

     예수님은 이 여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그리고 안수하셨고, 그러자 이 여자의 허리가 펴졌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여자에게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예수님에게는 축귀와 치병 이야기가 종종 따라다닙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고치셨고, 중풍병자나 시각장애인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친 일도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걸 완전히 부정하고, 어떤 이들은 그걸 무조건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대개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갑니다. 성서는 그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 여자가 치료되었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불치병이 치료된다고 생각하는 건 성서를 잘못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병자들이 다 치료받은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런 능력이 예수님에게 있다면 “온 세상 사람들의 병은 다 물러갈지어다.” 하고 외치셨겠지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영원하게 살지어다.” 하고 외쳤겠지요.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말인가요? 축귀와 치병 이야기는 다른 어떤 근원적인 것을 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꼽추로 18년을 산 여자를 예수님이 고친 사건을 보고 회당장은 분을 냈다고 합니다. 이건 분을 낼 일이 아니라 박수를 칠 일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은 분을 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일까요? 예수님과 경쟁 관계래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었다는 걸 보면 그가 원래 예수님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 분을 냈다는 게 이상합니다. 그는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데가 있긴 한가 봅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 13:14) 이 사람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병을 고친 것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게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일은 안식일이 아닌 나머지 엿새에 하면 됩니다. 18년 동안 장애를 앓은 이 사람이 하루 뒤에 치료된다고 해서 크게 억울한 것은 없습니다. 안식일 법도 지키고 여자의 병도 고칠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해서 법을 어기느냐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이죠? 합리적인 주장이지요? 이 회당장의 논리를 잘못이라고 말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당장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위선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안식일에도 사람들은 소나 나귀 등의 가축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 외양간에 풀어내고 또 그렇게 물도 먹였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칙을 어긴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법을 준수한 것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있습니다. 대략 5백 미터 정도 됩니다. 그 거리 내에서 가축을 몰고 간 것이니까 안식일 법을 지킨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노동을 금지한 상위법은 어기고 하위법을 지킨 것입니다. “하루살이는 걸려 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4)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선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총리, 장관 청문회로 열기가 뜨겁습니다. 위장전입은 거의 일반화된 현상입니다.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서 쪽방 촌에 투기한 분도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런 불법은 대통령이 지명하기 전에 완벽하게 걸러진다고 합니다. 만약 미국의 장관 지명자들에게 요즘 우리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은 사실들이 드러났다면 스스로 포기하든지 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조화인지 여론의 눈치를 살피면서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위선의 일상화입니다. 물론 사람이 늘 도덕군자로 살기는 힘듭니다. 실수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냥 자연인으로 살면 됩니다. 문제는 사회지도층이 되려는 사람들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또는 합법을 가장하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이 장차관, 총리, 대통령을 하면서 법 준수를 외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왜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느냐고 분을 내는 회당장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 회당장은 이 여자가 18년을 기다렸는데 하루 더 기다리지 못하냐, 하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18년이나 기다렸는데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회당장과 예수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건 인격이나 성품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입니다. 회당장에게는 법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회당장에게 법이 목적이고 사람은 수단인 반면에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이것은 서로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보수적인 시각이고,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시각이라는 차이가 아닙니다. 근원과 본질을 보고 있느냐, 외면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오늘 본문 사건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벌어졌습니다. 안식일의 뿌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창조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하셨으니까 사람도 7일에는 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은 생명 사건입니다. 둘째는 출애굽입니다. 애굽의 억압으로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안식일의 근본은 생명과 해방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곧 생명에 집중한다는 것이며, 또한 해방의 능력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해방되었습니다. 이것이 회당장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외친 안식일 법의 근본 의미였습니다. 그걸 놓치면 아무리 안식일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안식일에 매달릴수록 위선적인 사람이 될 뿐입니다.

     종교적인 안식일 법이 가리키는 생명과 해방은 세속의 법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법을 지켜야 할 이유도 생명과 해방을 확장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것 없이 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태도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법이 절대이념이 되고 사람은 수단이 되고 맙니다. 이런 법 절대주의는 18년 동안 꼽추로 산 여자에게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하루 더 참지 못하냐고 윽박지릅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성장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국경제가 더 좋아질 때까지 좀더 참으라고 요구합니다. 파이를 더 키우고 나중에 나눠주겠다는 논리입니다. 그 나눔과 분배의 그때가 언제일까요? 예수님을 향한 회당장의 비판이 당연시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생명과 해방 영성

     정치 경제적인 복잡한 문제를 우리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책임을 맡은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교회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더 엄밀하게 말해서 그 어떤 위대한 정치 지도자가 나와도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형편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분명한 방향을 놓치면 안 됩니다. 안식일이 말하는 생명과 해방 영성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보이는 것만큼의 영적 수준에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것이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면 이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적당하게 적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겠지요.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사실 앞에 정직하게 선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삶의 문제를 구원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해방의 영성에 진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구도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바로 18년 동안 꼽추로 살아온 이 여자처럼 무언가에 매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삶에 따라서 다릅니다. 우리로 해방의 영성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단순히 병이나 잘못된 습관, 기구한 운명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비판한 회당장도 역시 꼽추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의 영혼은 안식일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교양이 있고, 웬만큼 재산도 있고, 자식들도 다 잘 됐지만 정신적으로 그는 꼽추입니다. 그는 해방의 영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자체가 꼽추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방의 영성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를 모든 매여 있는 것에서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 삶으로는 별로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더 깊이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해방의 영성을 추구하는 믿음의 동지들과 같은 길을 가보십시오. 사람을 매임에서 푸는 이 세상의 해방 운동에 참여해보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놀라운 생명과 해방의 세계로 인도하실 겁니다. 아멘. (성령강림절 후 열셋째 주일, 8월22일)

                                          

 

 주는 우리의 평화!

(엡 2:14-18)

 

 

    초기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지금 우리 눈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으로 교회가 분리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이방인은 그 이외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원수처럼 생각했고, 이방인도 유대인을 해괴한 짐승처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떤 문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이유가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성서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자리를 잡든지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지켰습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유럽에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일으켰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반유대주의가 있었고, 지난 2천년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만 아는,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각인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비인간적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이 유대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는 이런 반유대주의에 힘입어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여러 곳에서 살해했다고 합니다.

     2천 년 전 초기 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토라 문제에서 불거졌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대표할만한 인물이었지만 신앙에서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입장에 섰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유대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그리스와 로마 교회가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여기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역사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원수처럼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방인 교회 안에서 일치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일치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일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단순히 서로 화합하자고 말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극복되는 건 아닙니다. 출발은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신학적인 인식의 문제입니다. 에베소 기자는 그것을 오늘 설교의 본문인 2:14-18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원수 된 것

     에베소서 기자는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은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16절에서도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원수 된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종교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한 규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가리킵니다. 신생아 남자 아이들은 7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부정한 음식이었습니다. 피도 마시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런 율법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정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절대규범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두 집단이 한 교회 안에 머물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아니면 이방인들이 율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집단은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율법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런 것들은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인 고민과 투쟁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원수 된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교회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는 절대규범과 이데올로기들이 없습니까?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원수 된 것은 교황제도일지 모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을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정교회와 개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문자주의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역사적으로 비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합니다. 성서문자주의는 한국교회의 일치를 가로막는 담이고, 원수 된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 주일입니다.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금년에도 8.15를 맞아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공동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문을 예배 중에 함께 읽었습니다. 남북통일은 한민족에게 지상명령과도 같습니다. 지금 기차를 타고 개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섬이 아니라 대륙에 속한 나라 중에서 이렇게 육로가 막힌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겁니다. 앞으로 2백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부끄럽습니다. 남북통일은 별로 시급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당장 취업을 해야 하고, 집도 사야 하는데, 통일 문제는 오히려 귀찮습니다. 가난한 북한과 통일을 해봐야 우리가 손해나는 일이니까, 그냥 현재 이대로가 좋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자신의 생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에베소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둘로 하나를 만드신다는 겁니다.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뜻으로 새겨도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신자라고 한다면 둘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남북을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갈라놓았고, 지금도 갈라놓고 있을까요? 그 원수 된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천지차이가 날 겁니다.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정권이 바로 원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만 무너지면 금방 통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합니다. 60년 동안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많은 분들이 감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저 놈은 좌파 빨갱이, 저 놈은 수구 골통 하고 서로 비판합니다. 앞으로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 분단 100년은 되어야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 사람들보다 시대를 좀더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수 같이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를 이룬 초기 기독교에서 배웁니다. 이건 단순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반복해서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에베소서 기자는 유대인이 옳다느니 이방인이 옳다느니,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지만 대개는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것만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입니다. 에베소서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시켰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엡 2:14-18절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골 1:15-20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송영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무슨 근거로 이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셨는지는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유대교 고위층과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이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유대교 고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종교적 체제의 중심에는 율법이 있습니다. 유대교 당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그냥 두면 체제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로마권력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는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서른세 살의 삶을 접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율법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실패입니다. 율법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단순히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부활생명이야말로 새롭고 참된 생명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생명을 얻으셨다는 것은 율법의 무효선언입니다. 율법으로는 부활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속성에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결국 자기 의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리나 죄인들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더 경건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것도 역시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의 행태가 이렇게 굴러갑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학벌과 돈벌이에서 자신의 의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남한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북한 체제는 남한보다 더 유치한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합니다. 서로 자기 의에 빠져서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 파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의를 세운다고 착각합니다.

     에베소 공동체를 비롯하여 초기 그리스도교는 생명을 얻는데, 즉 구원을 얻는데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것이 전혀 새로운 길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율법의 속성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는 거짓 의입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자기 의에 집착하면 다른 이들을 대상화, 타자화, 도구화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즉 율법을 무효 처리합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건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성적의 차이, 인종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생명, 그의 현존, 그의 영광 앞에서는 원수 같은 관계가 하나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의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으시나요? ‘당신 말’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에베소서가 노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이 평화로 바뀌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직 태양의 빛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자기 촛불만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태양 빛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영적인 눈으로, 성서의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원수 된 것을 허물어서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한만의 주님이 아니라 북한의 주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평화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의 것이기도 합니다. 금년은 해방과 분단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치인들이 뭐라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천리 반도에 평화통일의 기운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합니다. 이것이 제가 성서로부터 배운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 8월15일)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대구성서아카데미 정용섭목사 

(히 11:8-16) 

     이스라엘의 혈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혈통이 아닌 다른 계보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계보에서도 조상입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핵심 내용인 믿음이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라는 이방인의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왔다는 사실입니다. 미래가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의 이주는 단순히 삶의 자리를 바꿨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이삭을 얻을 때 보인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모두 나이가 늙어서 임신할 수 없었지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합니다. 이런 약속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닙니다. 세 번째는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브라함이 그대로 순종한 사건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적인 논리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서 이야기는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믿기 힘든 허황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큰 병에 걸렸는데도 기도로 낫게 해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들었다면서 병원 치료를 하지 않는 광신자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 광신자들과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이런 태도는 믿음이라기보다는 욕망의 투사입니다. 마치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성공에 자기 삶을 투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 운명과 미래를 건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했고, 사라를 통해서 백 살에 이삭을 얻었고, 그의 후손들이 별처럼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표본으로 내세웁니다. 신약성서도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모두에게 본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히 11:13) 이런 표현이 이상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모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면서, 다시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땅, 재산, 후손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찾은 가나안이 본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히 11:16b)

 

    나그네의 삶

     더 나은 본향이라는 이야기가 추상적인 것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나그네의 삶과 같으며, 외국인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아직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기독교적인 교양에 머물지 실제 영성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전하는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깊이 있게 따라가면 본향 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들릴 겁니다.

    

아브라함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도 썩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맨손으로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가 아버지 데라,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중간 기착지인 하란에 머물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나안으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를 요즘 식으로 계산해 낸 사람도 있더군요. 빌게이츠보다 더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군사를 끌고 좇아가서 구해냅니다.

 

군사가 자그마치 318명이었다고 합니다.(창 14:14) 그 외에 집에서 일을 돌봐주던 하인들도 많았겠지요. 그는 명실상부 거부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믿음도 좋습니다. 모두 부러워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진 거나 진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궁극적으로는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여전히 나그네로 규정하고 본향을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행가 제목에도 나오고 영화나 수필에도 자주 나오는 주제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일상에서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에 쫓기는 사람이 어떻게 나그네의 삶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모든 것들이 다 급합니다. 마치 화장실이 급한 것과 같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식 문제일 수도 있고, 자기 출세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부부 사이의 문제나 사회적인 명예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돈이 가장 급한 문제이겠지요. 아무도 이런 것을 초월해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카를 구하려고 군사를 동원해야 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둘째 부인인 하갈과의 긴장과 갈등도 간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당장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아프면 누워야 하고, 공격을 당하면 방어해야 합니다. 인생살이는 급한 용무로 넘쳐납니다. 그러나 삶이 나그네라는 영적인 실존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급한 용무에 쫓길 때는 어쩔 수 없이 쫓긴다고 하더라도 기회를 얻는 대로 삶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중심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태가 각자의 삶에서 어느 정도로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영적인 건강이 달라집니다. 거의 매 순간을 그런 영적인 성찰과 자각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곧 성서기자들이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여러 영성의 대가들입니다.

    

 영적인 실존이 나그네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좀더 명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우선 우리의 실존 자체가 일시적, 잠정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평생 돈을 모아서 집을 샀다고 합시다. 그 집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사는 게 아닙니다. 집이 없으면 불편한 게 많지만 집이 있다고 해서 불편한 게 모두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직장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을지 모릅니다. 멋진 인생을 설계하는 꿈에 부풀어 있으니까요. 잊지 마세요. 그 젊음도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그 젊음을 계속 붙들려고 하다가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지금 이 땅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말 터이니 무조건 잘 먹고 잘 살자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나그네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걸 우리는 감수해야 합니다.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나그네로 규정한 것은 더 나은 본향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그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본향을 찾는 사람이 지금은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딜레마였습니다. 참된 본향이 아닌 이 땅에서의 삶은 외롭고 고독한 실존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얼마나 강하게 느끼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강하게 느끼려면 ‘더 나은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도 아닙니다. 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서 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사람은 외국인이요,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거나 그런 느낌의 강도를 무의식적으로도 약화시켜나갑니다. 거꾸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더 실감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돌아갈 본향인 하늘나라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요? 그것이 우리의 생각에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막연한가요?

 

    하늘나라

     가장 일반적으로는 죽어서 가는 천당을 하늘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배고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천당에서도 각자 받는 상급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천당, 또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젊어서 죽고, 아들이 늙어서 죽었다면 천당에서 죽을 때의 그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걸까요?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피부색도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단순히 호기심을 유발시키기는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생명의 문제를 여전히 이 땅에서 경험하는, 즉 나그네와 같은 차원의 생명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앞으로 돌아가야 할 생명의 세계가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세계와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본향은 우주 비행선을 타고 지구와 비슷한 조건의 어느 행성에 가서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을 자기에게 익숙한 어떤 것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오히려 그 반대를 가리킵니다. 스텐리 하우어워스는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 내려하고, 급기야 어떤 이들은 ‘사용자 중심의(user-friendly)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카펫이 깔린 침실 같은 본당에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고, 부대시설로 농구장을 구비한, 주변 문화와 너무도 흡사하게 만들어진 이 교회에서 우리는 무언인가 낯선 것, 기이한 것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다.”(57쪽)

    

하늘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공간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생명이 은폐되어 있는 곳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지금 우리의 삶이 나그네와 같다는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의 삶은, 즉 생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완성되는 때를 가리켜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듯이 참 생명과 거짓 생명을 구분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의 생명이 아무 의미가 없거나 가짜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금 우리의 생명은 부분적인 겁니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만으로 내 인생 전체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인생의 많은 부분들은 숨어 있습니다. 이 숨어 있는 생명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 하늘의 생명이 곧 부활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향이 있습니다. 거기서만 우리의 생명은 완성됩니다.

    

이미 그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은폐된 종말론적 생명의 선취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는 참된 생명이 그에게 당겨져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신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하늘과 하나님, 하나님 우편은 모두 똑같이 은폐된 생명 사건이며, 생명 능력입니다. 하늘나라의 본향에 이미 들어가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그 나라를 선물로 줄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인식과 경험과 믿음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 이외의 것들, 즉 물질적인 복을 받거나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의 시작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한 그런 억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세속적인 행동도 자주 할 겁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결코 매몰되지 않습니다. 질적으로 다른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에 힘을 내십시오.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 8월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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