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

부활 그 이후의 삶

양현모 2011. 4. 18. 21:38

 

 

 

오늘의 말씀(2011년 4월24일)

부활 그 이후의 삶 (새장승포교회 민귀식목사)

마태복음 28장 1절~10절 말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며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 질 할 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부활 그이후의 삶’이라는 주제로 말씀의 증거를 나누고자 합니다!”


“개혁은 창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교황 중심으로 종교적인 정통성이 확립 되고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마틴루터는 부활절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결혼해야 되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신부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행위이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결혼에 대한 결심을 주변에 밝히게 되는데 주변의 부정적인 의견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맞지만, 결혼을 하면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반대에 부디치게 된다. 하지만 마틴루터는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은 채 ”나는 성경적 가정의 모본을 실천함으로서 천사들을 웃게하고 나를 비웃는 마귀들을 울게 할 것이다!“ 선언하고 결혼을 결정하고 자신의 종교개혁의 의미에 공감한 ‘카타리나 폰보라’와 결혼생활을 하게된다.”


마틴루터의 고백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나의 아내다!“

 


“마틴루터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개혁의 선봉에서서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다가오고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가톨릭 교황청은 교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신부 마틴 루터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내렸습니다.

루터가 이 일 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어느 날 상복을 입고 남편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루터는 아내에게

“누가 죽었는데 상복을 입고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루터의 부인은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화를 내며 “어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는 분이냐”고 책망 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는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낙망하고 있느냐”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마틴루터는 이 말에 용기를 얻고 거대한 교황청과 맞서 종교 개혁의 막중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장사지낸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부활의 주님을 마나는 것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 이후의 삶

첫째)기쁨이 넘치는 삶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자 예수의 제자들은 살수 없겠다며 낙심하면서 갈릴리로 돌아가거나 두려움에 떨며 슬픔과 한숨 속에 살아가게 되는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고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된다. 지진이 일어남과 동시에 예수님의 돌무덤을 누군가가 열게 되는데 그 형상이 천사의 모습이며 이를 발견한 여인들은 떨리고 두렵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본문 천사의 말 5절~6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며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누가복음 24장 5절~6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 하셨는지 기억하라


두려움과 무서움과 떨림이 다 사라지고

본문8절)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 질 할 새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의 기쁨이 넘치고, 부활의 감사가 넘치고 부활의 은혜가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고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죄와 죽음의 문제다. 사망의 늪에 빠지거나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번민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떨 수밖에 없으며 죽음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죽음이후에 확실한 부활이 있다면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세계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찬송가>기뻐 찬송하세

1,기뻐 찬송하세 주님 부활 했네 그 무덤의 권세 다 깨뜨렸네

2,기뻐 찬송하세 밝은 빛이 왔네 그 어둠의 권세 다 이기셨네

3,기뻐 찬송하세 주님 피를 흘려 그 속량한 값을 다 치르셨네

4,기뻐 찬송하세 죄를 사했으니  그 속죄한 은혜 다 찬송하세


후렴>

찬송하고 전파하세 대속하신 주님 할렐루야 찬송 다시 사셨도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


둘째)우리 주님께 늘 경배하는 삶

본문9절)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경배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같음을 느끼면서 경배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경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할 수 있다.”


사도베드로의 말

사도행전 10장26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두 사도의 말

사도행전 14장15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영국 황실에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대주교 월리엄 템플에게 국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자 윌리엄 템플(willam temple)은 “여왕 폐하이시여! 위로는 해답이 아니라 예배가 해답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이 살아계신 주님 앞에 엎드려 그를 경배 한다면 역사는 달라 질것입니다!”


“문제의 해결 자이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드리고 예배하고 경배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역사가 이루어 질것입니다.”


셋째)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

본문10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마가복음 16장 9절~11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쫏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삶을 살았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마났으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메신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갈릴리로 가라!

(상징성)

-소망이 없는 곳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 속에서 절망 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착취당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희망을 주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갈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부활의 희망을 주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가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나타났을 때 유럽은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 유럽의 막대한 권력과 부는 이들 몇몇 소수의 나라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 인구 4백만의 영국, 인구 8백만의 스페인, 1천 6백만의 프랑스 시민, 1천 2백만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략 2천만의 독일 시민들에게는 종교의 문제가 곧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 나라 중 유독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인 독일인들만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지 못하여 도저히 단합되고 통일된 힘의 집중을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압도적으로 많은 시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군대 하나 제대고 유지하지 못했다. 이러한 힘의 약세는 어쩔 수 없이 분열된 봉건 영주의 권력구조를 형성시킬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는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약삭빠른 로마 교황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열망 속에서 강력한 통치기반을 확보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당연히 분열된 독일에서 더욱 더 엄청난 재정적 착취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가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이신칭의(i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교리를 주전 이미'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과연 적법한가?'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독일인들은 전적으로 루터를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환호 속에는 단순히 교황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그 동안 쌓여왔던 반항뿐만이 아니라 독일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먹칠한 교황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와 같은 정치 경제적인 요소 이상의 더 절박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세 말기 이후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감을 하나의 집약된 혁명적 세력으로써 나타낸 결정적인 것이다. 루터는 이 혁명적인 세력을 종교개혁 초기에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 진행 중에는 대부분 독일 귀족들로부터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심연에서 시달리는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원리 곧,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중세의 한 제도 교회와 그 제도 교회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체계를 붕괴시키는 철퇴를 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을 염두해 두고서 이 글에서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함으로 종교개혁에 강하게 흐르는 핵심적 신앙을 살피고자 한다.

 

 1. 시대배경

15세기말과 16세기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사상가가 배출되었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전 유럽인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우뚝 서있었으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혁명적인 신이론을 체계화한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였다. 시대의 대세는 이미 변화와 창조적 활동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 그 동안 묶여있던 중세사회 체제를 단숨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발전적 인간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산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 내버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 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무정해졌고 강퍅해졌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16세기 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와 홍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화가나 조각가들이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잘 묘사한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대신 무지개 위에 앉아 죄인을 하나 하나 정죄하는 무서운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림 속 그리스도의 오른쪽 귀에는 백합, 왼쪽에는 칼이 있었다. 칼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백합화는 부활하여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을 상징하였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절박한 심령으로 무거운 짐을 메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오히려 "최선을 다하라" 곧 행동으로 백합화를 얻으라고 말해 무거운 짐을 더 언지는 것을 조장했다.

그 당시에 구원이란 개인의 최선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래서 순례, 구걸, 성자와 성물 숭배와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이들의 영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술 더 떠 성인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여 진열하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만약 고해성사를 게을리 하면 결국 연옥으로 떨어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고 으스름을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 전쟁시에 고안된 면죄부는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되었다. 얼마나 죽음과 심판의 공포가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이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 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2. 루터의 생애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광산촌 만스펠트 지역에 속한 조그마한 아이스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체험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경험하면서 자랐다. 그는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의무적으로 노래해야만 했다. 루터는 3년간의 아이제나하의 생활을 마치고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을 맞이하였다. 이 대학은 후기 스콜라학문에 속하는 스코투스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오캄과 가브리엘 비엘로 이어지는 유명론의 전통에 서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출세를 보장하는 법학을 공부하기로 하였고 또한 자격을 가졌다. 그러던 그가 주위의 부러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오히려 루터를 모독하는 내용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는 영혼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으로부터 죄사면의 확신을 받기를 원했다. 그의 이런 자세가 수도원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루터가 문을 두드린 수도원은 어거스틴파 운둔수도회였다. 이 수도원은 당시에 가장 신선한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여기에는 후기 유명론에 입각한 스승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교황의 절대성, 양심의 가책, 교황의 면죄부의 효력 등을 엄격하게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런 유명론 신학에 서서 혼자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었고 스승들의 글을 읽도록 하였다. 루터는 성경 읽는 것이 금지 당한 채 자신의 죄를 찾아서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고해 성사는 수도원의 가벼운 규율을 어긴 데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찾아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백해야 할 죄를 찾지 못한 듯한 자책감 속에 있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뇌를 알아차린 사람은 당시 교황청 대리인으로서 교황청을 방문했던 요한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의 고민을 듣고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대 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무능이 서로 상반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의롭게 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슈타우피츠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서 서로 교제할 수 있으므로 믿음이야말로 의인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었다. 루터가 이런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후기 유용론적인 참회제도를 벗어나는데는 무려 2년이란 고뇌의 기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런 깨달음이 중세의 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대의 문을 열었으며,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것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을 못박은 소리와 함께 중세인들의 귀에 울려 퍼져 나갔던 것이다.

 

3. 비텐베르크의 루터

후기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유능한 교수를 초빙하고 도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선제 후 프레데릭도 챨스 5세의 삼촌으로서 자신의 영지 내에 대학을 세움으로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마을에 대학을 세우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모집했다. 그러나 운영이 점점 어려워지자 프레데릭은 새로운 교수진을 초청하기를 원했는데 루터는 슈타우피츠의 추천을 받아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로 옮겼다. 루터는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했으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를 요청 받고 어거스틴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설교도 하였으며 1511년에는 교단의업무 차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의 공적인 업무를 마치고 거룩한 계단에 이르러서 전통에 따라서 무릎으로 오르다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떠올라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토록 거룩했다는 로마의 부정과 부패를 보고서 중세적인 제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1512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는 중세적인 스콜라 강의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는 실천적인 힘이 있는 강의를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란 그리스도 역사적 사역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러한 사면에 대한 깨달음이 성화의 시작이다.

루터는 1515년과 1516년에 어거스틴과 중세의 신비주의를 더욱 연구하였으며, 이때부터 중세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비텐베르크 대학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루터의 종교개혁은 상호유익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다. 즉 루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삼촌인 프레데릭의 신변보호가 필요하였고 프레데릭은 자신이 세운 대학을 명문대학으로서 성장시켜주는 명교수이며, 명 설교자인 루터가 필요하였다.

 

4. 95개 논제를 못 박기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면죄부였다. 중세의 참회제도에 의해서 사람은 완전하게 죄를 고백할 수 없으며, 사제가 부과한 보속행위도 완전하게 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누구든지 영세를 받았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누구든지 연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옥에서의 고통의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키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 것은 중세의 미덕이었다.

1513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는 전임자 율리오스 2세가 남겨놓은 재산을 탕진하였다. 르네상스 교황으로서 그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교황청의 재산을 탕진해버린 그로서는 면죄부를 다시금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레오 10세가 선포하고 브란덴부르크의 알버트와 마인쯔의 대주교가 징수를 맡고 도미니크파 수도자 요한 테첼이 판매하였던 면죄부는 루터를 그대로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입성한 면죄부 판매인 요한 테첼은 "하늘 문이 열리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다행히 비텐베르크는 프레데릭의 명령에 따라서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이 인근 부근에까지 가서 면죄부를 사오는 것을 보고 루터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매년11월1일 모든 성자의 날을 기해서 프레데릭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에 보관 중이던 유물을 무료로 개방하였으며 그날이 되면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유물에 보관되어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부속교회당 정문에 95개에 달하는 면죄부 반박 논제를 못박아 게시하였다.

 

5. 라이프찌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이 개최되었다. 이것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을 게제한 후 엑크는 "오벨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해서 발표하고 또다시 루터는 "아리테리스크"라는 답변서를 작성하였다. 이렇게 시작되었던 대결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자 결국 라이프찌히 신학논쟁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노련한 논쟁사 엑크의 승리로 끝났다. 루터 스스로 이단을 좋게 말하게 함으로서 스스로 이단에 속한다고 인정케 하였다.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간파하였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단순하게 면죄부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 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터는 힘이 있었다. 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를 도와주었으며, 도시민들도 독일이 로마로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마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로마교회의 존재를 뒤엎어 버리고 동시에 종교개혁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3개의 논문을 발표 하였다.

 

6. 종교개혁 3대 논문

1519년 라이프찌히 신학 논쟁 이후로 엑크는 로마로 돌아가서 교황청 법원회의를 개최하였다. 일련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1520년 6월15일 출교교서는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루터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과 때를 맞추어서 출교교서는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이어서 루터는 같은 해 8월에 기독인의 자유를 발표하였으며, 또 다시 10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서 루터는 1520년 12월10일 교황의 출교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움으로서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출교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교황청 출교 교서는 시편 74:22절을 인용하면서 작성되었다. 여기서 루터는 41개조의 정죄문과 더불어서 루터의 모든 책을 소각할 것을 명하였으며, 모든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추종하는 사람들의 동조를 취소할 것을 명하였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먼저 교회의 3가지 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첫째는 교회가 지닌 영적인 권한으로 인해서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권, 둘째는 교황의 성경 해석권으로서 어느 누구도 성경을 통해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한 특권, 세째는 회의 소집권을 오로지 교황에게만 국한시킴으로서 어느 누구도 회의로서 교황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 특권. 이상의 3가지 담이 지금까지 로마교회를 세속화 시켜 왔으며, 교회를 지켜주는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교회가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평신도를 통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대원리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직"이론을 주창하였다. 루터는 사제의 중재라는 중세의 대 원칙을 무너뜨렸다. 이상과 같은 루터의 만인제사직 이론은 중세인들을 사제의 공포와 전횡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다.

 

7. 보름스회의

1520년 12월 10일 루터가 교황청의 출교교서를 소각하였다는 소식을 곧바로 독일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으며, 이제 독일인들은 루터가 독일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즈음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이 죽고 그의 손자인 찰스 5세를 선출했다 그의 대관식을 갖고 첫 번째로 주재한 회의가 1521년 1월 22일에 개최한 보름스회의였다. 교황청에서는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루터의 범법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루터는 보름스회의에 두 번 출두하였으며, 무오하다고 믿는 교황과 성경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는 루터 사이에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를 윔스로부터 비텐베르크에 되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설교는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루터가 사라졌다. 프레데릭은 협상이 결렬된 이후 루터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킬 것을 슈팔라틴에게 명령하였으며, 루터는 바르크부르트에 피신해서 융거 게오르그라는 이름을 가진 귀공자로 변장해 있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고전에 속하는 교부들을 더욱 열심히 연구했으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영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어떤 의미에서 제2의 영적 고뇌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이 기간은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여 동안 영적인 고뇌의 기간을 가졌던 것과 동일한 준비의 기간이었다.

크게 움츠릴수록 더 높이 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종교개혁에도 적용될 수 있었으며, 아마도 하나님께서 루터에게 이 기간을 허용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8. 농민소요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랑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전역에는 농민들의 권리회복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 가장 강력한 지지를 입고 있는 푸레데릭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레데릭은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선제후와 농민들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개혁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농민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사태는 북독일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은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 줌으로서 원하는 독일의 개혁이 달성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운동을 자제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개혁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레데릭이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떼를 반대하여"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에게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말하였다. 물론 루터의 고민을 충분하게 이해 할 수 있으나 그는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설교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소요는 루터의 개혁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9. 루터의 죽음

루터적인 개신교를 지지하는 슈말칼트 동맹은 헤세의 필립이 이중 결혼으로 인해서 심각한 타격을 입기는 했어도 개신교측은 꿋꿋하게 버티어 나갔다. 그러나 찰스 황제가 1544년 프랑스와의 평화를 마무리 지음으로 이제부터는 독일문제를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트렌트에서 총회를 개최하도록 명하였다. 그렇지만 개신교들은 여기에 따르지 않으려 하였으며, 총회는 생각보다 지루하게 지속됨으로서 황제는 무력을 사용해서 개신교도들을 무찌르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루터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평가해 보자면 다른 일반역사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먼저 긍정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신약성경(특히 바울신학)과 어거스틴의 신학이 이미 주장했던 믿음으로 칭의되는 원리의 재발견이다. 둘째, 신앙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를 제도 교회나 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인정하여 중세 천년 동안이나 가두어둔 말씀에 얽혀있는 사슬을 풀어 모든 사람이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셋째, 만인 제사장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모든 개개인이 제도나 의식의 중개 없이 하나님께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였다. 넷째, 모든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는 성속일원론을 주장함으로써 중세의 성속이원론을 배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제나 수사가 평신도 보다 더 고귀하다는 성직우위론의 주장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다섯째,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그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되었다, 영국인 틴 데일의 영어성경이 좋은 예이다. 여섯째, 루터는 화목하고 따뜻하며 찬양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몸소 이룸으로써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은 한편으로는 부패했던 카톨릭 교회에 직, 간접 영향을 줌으로써 카톨릭 내부의 갱신과 개혁을 이루게 했다(counterreformation)는 긍정적인 평가들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점을 찾아본다면, 첫째, 카톨릭 교회의 핵심적인 기반이 되었던 수도원의 폐쇄를 주장함으로 중세 내내 문화의 보존, 빈민구제, 교육 등과 같이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준교회격인 수도원들이 더 이상 사회에 공헌하지 못하게 길을 차단하였다. 이는 수도원의 선교영역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매우 애석한 일이다. 둘째,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포함되었다(The Word of God contain in the Bible)고 함으로써 성경의 총체적 권위와 절대 무오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성경의 선별적, 차등적 권위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성경의 권위를 축소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두 왕국론을 주장함으로써 성소가 정치압제자나 독재자에 대한 과감한 저항을 할 수 없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루터 파의 신학적 유산은 결국 나치 히틀러의 독재를 허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넷째, 독일 농민봉기시 항쟁하는 농민들에게 과격한 진압을 허용함으로써 많은 농민 사상자를 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어떻게 가난한 벽촌에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가진 것도 없이 엄청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성공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그렇지만 루터에게는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을 철저하게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루터의 가장 큰 꾀는 꾀를 부리지 않아야 한다는 바로 그 꾀였다.

루터는 말씀의 사람이었으며,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경건의 사람이었다.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믿으면서 모든 것을 기도로써 시작하고 기도로써 끝을 맺었던 사람이었다. 루터는 또한 자신의 개혁을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계획표를 짜고서 밀고 가지 않았다. 루터는 일이 되어지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갔으며, 억지로 일이 되게끔 몰고 가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루터가 단 하나 머리를 써서 세밀하게 이끌어갔던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절대로 개인자격으로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루터는 자신의 의견을 언제나 공중적인 전체 회의나 집회를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루터는 당시의 시대적 조류인 회의 중심적 개혁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루터의 개혁은 철저하게 복음 중심적인 원칙적인 싸움이었지 무력이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힘이 있으며, 또한 동시에 지식인들과 지도층의 지지를 확보하였다. 루터는 개인의 인기를 편승해서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본인이 몸소 터득한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심어 줌으로서 중세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해야 된다는 강한 사명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사 속의 여인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극적인 수녀원 탈출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여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일 것이다.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루터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를 향한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야무진 역할이 더욱 그녀를 소문나게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16세기 당시 교회의 한 여인으로서, 게다가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의 아내로서 과연 어떠한 역사적 생애를 이룩하였을까?

1499년 1월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위시하여 전 유럽에 열화와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루터의 저술을 수녀원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은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이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루터가 있는 독일의 작센(Sachsen) 지역은 신앙적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작 게오르그(Georg)가 통치하는 지역은 여전히 카톨릭을 지지하며, 다른 한쪽은 루터의 친구이면서 또한 생명의 은인으로 역사 가운데 소문이 나있는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통치하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그런데 카타리나 폰 보라가 소속되어있는 님브센 수녀원은 다름아닌 게오르그가 다스리는 카톨릭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매우 강경하여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루터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한 상인 토르가우(Torgau) 출신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와 함께 특별한 수송작전으로 원하는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키는 그러한 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탈출하고자 하는 수녀들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그날 저녁에 수송작전에 참여하여 부활절이 끝난 다음 화요일에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 학생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여기에 도착한 한 마차 사건보다 더 흥미 진지한 이야기는 없다. 그 마차는 처녀들을 가득가득 짐으로 싫어왔다. ...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신랑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면, 이 살벌한 기간에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루터 역시 이들의 장래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들이 다른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는 교사가 되었으며, 둘은 어느 가정에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리나 폰 보라는 2년 동안 비텐베르그의 한 가정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훌륭하게 가사를 몸에 익혔다.

 

매력적인 여인

 

사실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 피신하여 이 곳 비텐베르그에 거하였는데, 그는 그녀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또한 뉘른베르그 출신 히에로니무스 바움개르트너(Hieronymus Baumg rtner)는 25세의 귀족 가문의 청년으로서 당시 24세의 카타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편지를 썼다. "여보게 빨리 일을 진행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각 히에로니무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각의 태도를 루터는 나무라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함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루터는 카타리나를 글라츠(Glatz) 박사에게 중매하였으나, 그녀는 루터의 그러한 호의를 박절하게 사양할 수 없어 암스돌프(Amsdorf) 박사를 통하여 거절하였다.

 

 

루터에게 향하는 카타리나

 

사실 카타리나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으로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푸는 루터와 암스돌프가 바로 그러한 남자들이었다. 카타리나는 루터나 암스돌프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면에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두 남자들은 아직 독신들이었으나, 자신들과 카타리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연령차로 인하여 결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의 나이 차는 루터가 16세나 연상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과연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독신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숙고한 끝에, 루터는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것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7년 후에는 결혼을 하여 아버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큰 너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1520년 루터가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농부로 변장하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칩거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문은 비텐베르그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루터는 "오 하나님! 우리 비텐베르그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사건이 1524년에도 있었는데,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가 루터에게 결혼을 통하여 복음의 확신을 제시하기를 강요하였을 때도 루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때 루터는 그녀에게 "나는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무와 쇠로 만들어져서도 아니며, 나의 육체와 정욕이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나는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죽음의 위험이 시시때때로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타리나를 루터 부모에게

 

그런데 42세의 루터가 다른 생각을 하게되면서 카타리나를 부모에게 소개하게 되었을 때, 루터의 아버지는 얼마나 놀랐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도원에서 독신서원을 한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충격적이었으나, 반면 이제 손자를 볼 수 있게 됨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루터를 향하여, "그의 아버지는 행복하였을 것이며, 교황은 아주 화가 났었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하였을 것이며, 사탄들은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의 음성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이 없다"는 말은 적절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루터의 결혼에로의 결단은 엄격히 볼 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여기 저기서 혼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 과시적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잘못된 카톨릭의 이원론적 결혼관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성경적 결혼관에 동의하면서 이에 따른 신앙고백적 행위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찾아온 부부간의 사랑은 얼마간 살고 난 후 였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친구에게 한 루터의 말을 통해서도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도 아니했고,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해서 뜨거워지지도 아니하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아내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캐테(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뺏길 수는 없네. ...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에게 선물하셨고,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네. ... 다른 여인들과 나의 캐테를 비교할 때 다른 여인들에게서 나는 보다 많은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네. 물론 그녀 역시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훨씬 큰 덕성들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네."

 

"하나님의 선물"

 

토마스 뮌쩌(Thomas M ntzer,1490?-1525)가 이끄는 농민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한참 불어닥치고 있는 1525년 6월 13일 네 명의 증인 앞에서 루터는 케테와 소박하게 그러나 역사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주 후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거리축제가 열렸다. 풍족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이 축제에 루터의 부모도 기쁨으로 참석하였다. 루터의 행복한 결혼과 사랑스런 부부를 바라보며 독일의 교회사가 마틴 브레히트(Martin Brecht)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을 향한 신앙고백적 행위였다. 케테는 의식 있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남편인 루터에게 소신을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1526년에 태어난 요한네스를 위시하여, 1527년 엘리자베트, 1529년 마그달레네, 1531년 마틴, 1533년 파울 그리고 끝으로 1534년 마가레테가 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엘리자베트는 1528년에 마그달레나는 1542년에 아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다. ... 점점 규모가 커져 가는 집안 일을 활동적이고 규모 있는 이 여인은 무엇보다도 더 잘 감당하여야만 하였다"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루터가 그녀와 결혼한 후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며, 모든 점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랬던 그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 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네"라고 말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라고 불렀다.

루터의 명성이 커짐과 동시에 수많은 친척들과 수시로 찾아드는 손님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생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이 여인이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하였던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당시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의 생명의 은인이자 동시에 루터의 추종자로서 후한 생활비와 함께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쓰던 40개의 방이 있는 큰 건물을 루터의 가정을 위해 내놓았다. 그럼에도 엄격히 볼 때 수많은 식솔들 때문에 그렇게 생활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카타리나 부인은 이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비난의 편지들

 

그렇다고 루터의 결혼을 마냥 축복스럽고 흐뭇한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케테와 부부생활을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케테 앞으로 비난의 글이 전달되었다. 사실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루터와 수녀원의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가 독신서원을 깨고 함께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당시 루터를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절호의 비난거리임과 동시에 세상사람들에게는 이야기 거리가 족히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유혹에 빠진 계집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네가 빛에서 어두움으로, 수도원적인 거룩한 신앙에서 저속하고 추잡한 생활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 없는 삶으로 타락되었다는 단지 그러한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 너의 그러한 사악한 삶의 모델을 통하여 아직 때묻지 않고 가련한 어린아이들을 역시 이러한 비참함으로 이끌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이 두 사람은 결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이며 질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고 거룩한 사랑으로 돈독한 부부애를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신선한 유모어를 잃지 아니했으며 격려와 용기를 아낌없이 서로를 향해 쏟아 부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크나큰 살림을 감당하는 아내를 향하여 한 번은 "우리의 여 주인장 케테, 여 주방장님"(Unsere Herrin K the, Oberk chenmeisterin)이라고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유모러스하게 쓰고 있음은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루터 역시 아내의 수고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게다가 루터는 그녀를 "케테씨"(Herr K the)라고 편지들 가운데서 종종 부르고 있는데, 물론 농담 섞인 호칭인 것은 분명하지만, 루터는 그녀의 탁월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어떤 남자 못지않은 여인이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케테는 여러 면에서 강한 생활력으로 활약을 했는데, 밭을 사들이고 경작하며, 가축들을 치며, 시장을 보고, 맥주를 담그는 등의 행위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카타리나가 많은 밭을 샀는데, 만약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것을 생각하면서 준비하였다. 당시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남편 없는 위기 상황을 예비하면서 그녀는 가장 안전한 준비인 토지를 사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하나의 부담이기도 했다. 루터 역시 토지를 팔거나 농사를 지을 때 축복스런 부로 이해했지만, 그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행위를 기꺼 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곡식은 황금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의 조언자

 

루터 역시 아내 케테의 말에 묵묵히 귀기울일 줄 알았다. 한 번은 한 친구가 루터에게 결혼식 축제를 집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루터는 정중히 이 부탁을 아내 케테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거절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 그리고 나의 케테도 그것을 허락할 수가 없구려. ... 나는 너의 부부 그리고 나의 부부에게도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구려. 내 생각에는 자네가 프라이부르그(Freiburg)에서 잔치를 행하든지 아니면 가까운 친지들만을 불러서 두 세 식탁 정도로 소박하게 점심 먹기 전 간식 정도로 준비하는게 어떨는지 하네." 우리는 루터가 이 결정을 할 때 아내 케테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카타리나는 무거운 신학적 물음에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였는데, 예를 들어 1529년의 「마부르그 종교회의」(Marburger Religionsgespr ch)에서 루터가 어떻게 성찬론에 관하여 토론을 이끌어 갈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녀는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부부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어쨌든 당시의 급박한 위기적 상황과 더불어 당시 종교개혁자 루터의 역사적 무게를 기억할 때 남편 루터를 위한 케테의 야무진 역할은 특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내 케테를 향하여 루터는, "나는 케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나는 내 자신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한다. 만약 그녀가 아이들과 더불어 죽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이다"(TR 2, 1563)라고 아낌없는 사랑을 토로하였다. 그녀를 향한 루터의 각별한 사랑은 비단 여기서만 제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분명 하나의 선물로서, 복음의 인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 사랑하는 케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좋은 남자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은 진정 여자 황제올시다.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구려!"(TR 1,1110) 부부애와 그리스도의 사랑에로의 인식은 가까이 있는데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루터는 로마서와 함께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를 위한 중요한 두 영적 무기로 생각하였는데,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루터는 "내가 진실로 신뢰하는 사랑하는 케테 폰 보라"를 일컫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각별한 루터의 부부애는 자신의 유언(1542년)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녀를 걱정할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경건하고 신실하며 부군된 남편 나를 언제나 한결같이 자비와 품위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사랑했으며, 본인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섯 자녀들을 낳았으며, 장성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도 잊지않았다(BR 9, 572f.).

 

평화로운 가정

 

루터는 가정의 평화를 참으로 귀하게 여겼다. "우리의 몸과 생활, 아내와 자식, 집과 정원을 위시한 모든 지체들인 손, 발, 눈 그리고 모든 건강과 자유가 평화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자리를 잡는다. 평화가 있는 곳은 거의 천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평화가 있을 때, 한 입의 빵 조각은 마치 설탕처럼 달 것이며, 한 모금의 물도 저 유명한 이태리 산(産) 말바의 포도주처럼 달콤한 맛을 낼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 이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평화는 카톨릭 교회를 위시하여 대외적으로 닥쳐오는 시련과 어려움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곤 하였고,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의 힘든 생애에 있어서 포근한 가정이 가져다주는 사랑과 평화는 너무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온 가족이 하나님께 함께 찬송함으로 극복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루터는 찬송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마치 잘못된 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이 그렇듯이 누구든지 찬송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들에게 나는 동의를 할 수 없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능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들의 심령을 기쁘게 만든다. 게다가 음악은 모든 분노, 불순, 거만 그리고 다른 무거운 짐들을 잊게 한다. 나는 신학 다음 자리에 음악을 놓으며,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고 싶다." 음악은 루터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은혜와 영적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고의 은사이다. 그러한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영적 힘이 되었으며, 감동을 주어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찬송으로 오늘 날 우리가 즐거이 부르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384장)를 기억하게 되는데, 가사를 음미할 때 참으로 핍박과 시련으로 위기 가운데 불렀던 찬송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과연 루터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실감하는 능력 있는 또 다른 기도였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루터는 또한 카타리나를 포함하여 가정의 모든 다섯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기타의 전신인 라오테를 연주하면서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의 시간을 수시로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별히 1866년 독일의 화가 구스타브 아돌프 슈팡엔베르그(G.A. Spangenberg)는 이러한 루터의 가정을 연상하며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인상깊은 한 대목은 루터의 동료 멜랑히톤이 함께 참석하여 루터 가정의 아름다운 합창을 흐믓한 얼굴로 청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찬송의 은혜 가운데 젖어 있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정은 참으로 바람직한 개신교 성직자 가정의 아름다운 모델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그림 참조).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

 

"사랑하는 딸아, 천국에 너의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시단다. 거기로 네가 옮겨가는 거란다." 이 말은 1542년 큰 딸 마그달레나가 14살의 다 큰 나이로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루터가 최후의 순간에 그녀에게 들려준 가슴 찡한 위로의 메시지였다. 루터는 이 마그달레나를 잃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른다. 또한 그 딸의 묘비에 루터는 친히, "여기에 루터 목사의 사랑스런 딸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안식 가운데 잠들다.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마땅히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얻었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영생의 확고한 소망 가운데서 딸을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내는 아버지 루터의 다른 면을 확인하게 된다. 카타리나 역시 이 사랑하는 딸을 장례 치르는 순간에 깊은 슬픔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어, "사랑하는 딸아, 너는 다시 살아 날거야. 그리고 별처럼 빛날 거야. 아니 태양처럼 빛날거야. 물론 이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구나!"라고 절규하였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로는 아들 셋, 그리고 딸 셋으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그 중 일년도 채 안되어 딸 엘리자베트를 1528년 잃고 난 후, 15년만에 너무도 사랑스런 큰 딸 마그달레나를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낸 것이다. 이제 남은 루터의 자녀들로는 아들 셋, 딸 하나였는데, 과연 그들은 어떠한 성장과정이 있었을까? 아이들과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사사로운 정보들을 우리는 루터의 담화록(Tischreden)과 편지들에서 거의 대부분 얻고 있다. 카타리나가 임신하여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1526년에 얻은 할아버지 이름 따라 부르는 첫 아들 한스가 걸음마를 어느 정도 빨리 하는지, 그가 이제는 제법 중얼거리고 말을 따라하며,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를 루터는 편지에서 흥겹게 이야기한다. 한 편지에서 루터는 어린 아들 한스의 "모든 성가신 일들마저도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 이는 축복된 부부에게 내리시는 열매이며, 행복입니다만, 교황에게는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지 않지요"라고 행복한 개신교 첫 번째 목사가정을 서술하였다. 아들 한스가 거의 열 한 살이 되어가고 있을 때 루터는 친구에게가 아니고 한스에게 라틴어로 쓴 편지를 보냈다. 바쁜 중에서도 자랑스런 아들 한스에게 아버지 루터는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로 격려와 함께 기대 섞인 편지를 보낸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딸 엘리자베트를 생각하면서 루터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트가 죽었다네. 나는 얼마나 슬픈지 말로 형용할 수 없네. 마치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이라네. 자식의 죽음이 이토록 아빠의 마음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지. 이전에 나는 이러한 상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네"라고 토로하고 있다.

1531년 11월 9일 카타리나는 둘째 아들 마틴을 출산하였다. 이 마틴을 루터는 "가장 사랑하는 보물"(mein liebster Schatz)이라고 묘사하곤 하였다. 또한 카타리나가 마틴을 쓰다듬으면서 하는 서로간에 사랑넘치는 대화를 보면서, 루터는 "나의 아내 케테가 사랑스런 아들 마틴에게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하나님은 나에게 자애로운 대화를 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행복한 소망을 표출하였다. 이러는 중에서도 루터는 늘 카톨릭과의 긴장어린 관계 가운데 있는 자신의 현실을 잊지 않았는데, 아들 마틴이야말로 대적자들인 교황, 주교들, 게오르그 공작, 황제 페르디난트 그리고 모든 사탄들을 물리치는 진리에 충실한 종이 되어 그 어느 때고 그러한 이들에게 "진정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외치길 원하였다. 루터는 또한 이 마틴이 출생하였을 때, "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주교들에게도 나에게 베푸신 이 큰 복을 주신 적이 없었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1533년 1월 29일 막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카타리나와 루터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바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케테를 통하여 이 밤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교황과 터어키인들의 새로운 대적자로 양육시키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 저녁이 지나기 전에 한 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한 복판에서 태어난 루터의 아이들은 종교개혁자 아버지 루터에게 있어서 확실한 동역자였던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1534년 12월 17일 카타리나는 막네 마가레타를 여섯 째로 출산하였다. 할머니의 이름을 따라 그녀는 마가레타로 불리었다. 루터는 마가레타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음악성을 발견하였고 가정 음악회에도 종종 참여하게 하였다.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카타리나는 건강하였다. 이러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루터는 늘 사랑하는 아내 케테와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독일어뿐 아니라, 때로는 라틴어로 대화를 하였으며, 서로가 멀리 떠나 있을 때는 독일어와 라틴어를 함께 쓰는 편지로 부부애를 나누었다.

 

카타리나의 성경지식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케테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마음 따뜻한 좋은 조언을 늘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녀 역시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 번은 루터가 아내에게 재미있는 약속을 하였는데,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 만약 아내 케테가 성경 전체를 다 읽을 경우 독일 돈 50 굴덴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돈을 그녀가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부지간에 표출되는 숨길 수 없는 흥겨운 사랑만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내 케테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성급하다. 루터는 종종 아내의 성경 지식이 뛰어남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것을 볼 때 늘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 번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하는 아브라함을 루터가 해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아내 케테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가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하여 루터가 언급하였을 때, 부인 케테는 다른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들을 살해하라 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루터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심을 결코 망설이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였다.

 

루터가 보낸 편지들

 

또한 우리는 루터 부부의 편지를 볼 수 있다. 부인 케테가 남편 루터에게 쓴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루터가 아내 케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상당수 남아있어 부부지간의 사랑을 우리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1523년 2월 27일 루터는 외유 중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케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부뤽 박사가 휴가를 내어 곧 내가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갈 계획이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구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오. 어제 저녁 나는 잠을 잘 잤소. 여섯 일곱 시간을 푹 잤고, 연이어 두 세시간을 또 잤소. 아마도 맥주 덕분인 것 같구려. 아무튼 빨리 당신이 있는 비텐베르그에 가고 싶구려."

1541년 9월 18일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쮤스도르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소식이 없으니 놀랍구려. 과연 이곳의 우리가 잘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지 말이요. ... 어쨌든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사시고 또는 계약을 하시구려 그리고 제발 빨리 집으로 오시구려." 루터는 당시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피난의 세월 속에서

 

구교와 개신교의 입장에 선 위정자들 사이에 발생한 여러 번의 내란, 터어키 군과 프랑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의 충돌들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루터가 아내 케테와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1546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럴 때마다 케테는 아이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한 번은 교황측의 군대에 의해 비텐베르그가 포위되었을 때, 케테는 자녀들과 함께 마그데부르그(Magdeburg)로 도피해야만 했다. 점령군이 철수하고 그녀가 가족과 함께 다시 비텐베르그로 돌아왔을 때, 밭의 곡식들은 온통 못쓰게 되었으며, 가축들은 점령군에 의해 잡혀 먹혔고, 가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반복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흑사병은 무참히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는데, 이러한 전염병이 휩쓸 때에도 사람들은 특별한 대책이 없어 또 다시 피난의 길을 떠나야 했다. 한 번은 케테가 아들 바울과 딸 마가레타를 데리고 이 흑사병을 피해 토르가우(Torgau)로 가서 전염병이 수그러질 때까지 그 곳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카타리나 부인이 말을 타고 다소 험한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얼음물이 고여있는 무덤 옆을 지나다 미끄러져 마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그녀는 토르가우로 옮겨졌고 당시 18세의 딸 마가레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3개월 후 1550년 12월 20일 51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여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간 남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보다 4년 10개월 뒤에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긴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16세기에 등장한 교회 속의 한 여성, 특히 가장 첫 번째 목사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를 향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자 루터의 아내라는 이유가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의 기대는 조금은 달랐는데, 교회사 속의 한 여인으로서 그녀의 독자적인 활약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를 향한 우리의 기대는 그렇게 충족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중 필자는 첫째,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주로 역사가들은 루터를 연구하는 중 만나게 되는 그녀에 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 루터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나지는 카타리나 폰 보라 부인의 모습이 우선적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인데, 이러한 자료의 빈곤은 결국 연구의 한계성으로 부각 되어진다. 둘째, 당시 16세기가 비록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전환의 순간을 창출해내고 경험하는 역사적 창조적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여인들의 교회적, 사회적 위치와 활약 그리고 봉사에 대한 기대가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여인들의 역할이 주로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집안 생활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여인들의 또 다른 활약에 건 기대가 얼마나 미약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미약한 기대는 결국 여인들의 다른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끝을 맺어야 하겠다.

첫째, 종교개혁 이후 가장 첫 번째 개신교 목사 부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있어서 확인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적-신학적 역할은 크고 위대했는데, 수도사 출신 루터와 수녀 출신 카타리나의 개인적 신앙결단에도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여기서 신학적이란 이신칭의에 의한 종교개혁적 새로운 인간실존이 선언하는 진정한 삶의 유형을 성직자 독신생활의 굴레를 벗기고 축복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자유의 모습으로 떳떳이 제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나타나는 종교개혁적 신학의 선언적 의미가 놀랍다.

둘째, 카타리나는 정숙한 목사의 사모, 신앙의 아내,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다섯 자녀들의 성실한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아내로서 그녀는 인격과 용기, 예민성과 강직함, 강한 의지와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인 활약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리나의 모습은 어쩌면 남편 루터의 여성관 내지는 가정관에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루터에게 부과되는 너무도 막중한 종교개혁적 사명이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역할을 기대하게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즉 오직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 남편을 위해서 부름받은 신실한 여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지혜로운 아내 숨은 동역자 카타리나와 함께 이루어진 신적(神的) 작품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의미있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카타리나를 통해서 제시되는 개신교 첫 번째 사모의 모습은 오는 시대 개신교 목사 부인들의 상(像)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렵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오늘의 말씀(2011년 4월17일)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새장승포교회 민귀식목사)

스가랴 9장 9절~10절 말씀

구원을 베풀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예브라함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애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말씀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 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려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림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 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더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 할 때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 이라고 하며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영접하고 환영했음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 에 손 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 했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지나가는 자리에 양탄자 깔 듯 깔았으며, 예수님이 지나갈 때에 좌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외쳐서 소리치기를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이로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외친 ‘호산나’히브리어 뜻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면서 ‘호산나!’하고 외쳤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처럼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고 예루살렘 시민들은 왜? ‘호산나!’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이 구원을 요청한 이유?

=>예수님을 정치적임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


요한복음 11장에 기록 된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고 돌무덤 속에 묻힌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려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요한복음 9장 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우의 눈을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놀라운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6장 에서는

어린 꼬마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들어 있는 도시락을 예수님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데 약 2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게 먹이고 12광주리를 가득 채웠다는 ‘5병2어’의 기적이 기록되어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자신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의 왕이 백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는 개선장군처럼 예수님께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며 권력자의 메시아가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게 된 이유?

첫째)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무든 인류의 구원자로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가 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가랴 9장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둘째)유월절의 어린 왕이 되기 위해서


“애굽 땅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리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는데, 집집마다 모든 장자를 죽이겠다. 이 재앙이 히브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도 내려졌다”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

=>어린 양을 잡아서 각 가정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하는 것


유월(踰樾) pass over

=>죽음의 손이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유월절을 우리나라로 치면 1월14일 다음 날 해질 때까지이며 이 절기가 다가올 때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재물이 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선지자 세례요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셋째)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모든 인류의 죄를 심판하도록 하기위해서


본문9장9절)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죄의 삯은 사망(롬 6:23)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 전가시켜 이 땅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으로서 이 당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


ꁠ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고초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를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을 아끼며 영원과 영원답게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ꁡ

 

  대구샘터교회 정용섭 목사

“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 26:14-25, 사순절 마지막 주일, 2011년 4월17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왕을 환영하는 듯한 멋진 장면입니다만 실제로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일까요? 제자들은 왜 스승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일까요?

     복음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다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판 이유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유추는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격이 파탄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고,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학문이 가장 깊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 관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다는 무력혁명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만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해서 배신했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복음서를 사실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제사장의 사병(私兵)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유다의 배신에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따라가기 힘든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체포에 관련된 미묘한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배신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됩니다. 마 26:31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고, 대표자로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끝냈다는 차이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가 자기잘못에 대해서 더 엄격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잘못이 더 엄중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베드로에게는 너그럽고 유다에게는 인색합니다. 복음서도 그런 입장을 견지합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당시 배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대표할 뿐입니다. 그 내막이 어떤지를 알려면 본문을 꼼꼼히 살펴야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돌아온 뒤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의식입니다. 양을 잡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이런 특별한 먹을거리는 출애굽 사건에 기원합니다. 유월절(逾越, pass over)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의 집만은 비켜갔습니다. 민족 멸절의 위기를 넘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고,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유월절 양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겠지요.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근심에 싸였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22절) 예수님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실감나게 들었을 겁니다.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말은 한 상에 둘러앉은 가족이나 형제, 친구처럼 아주 가깝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이어서 예수님은 스승을 판 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의 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징벌을 없습니다.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이에 관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금 우리도 생각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가룟 유다의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만약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인류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역사를 원인과 결과라는 실증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런 견해와 논란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스승을 판 제자는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음모가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이 위기를 모면할 궁리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을까요?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절) 이미 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유다도 말했을 텐데, 양심이 찔린 탓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려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스승을 배신하는 철면피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일부 여자들만 빼고 모두 그랬습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제자들의 발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안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추종자들을 조직하거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부처나 공자처럼 천수를 누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던 예수님을 생명의 실체로 만났다는 일부 제자들의 경험뿐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남아 있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났을 겁니다. 그냥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기회만 오면 떠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받을 정신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발언에는 배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불안감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신과 배교를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나무라고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들과 똑같이 배교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등한히 여긴다거나 떠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 수 있습니다. 이중적으로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나는 아니지요?” 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신앙으로 끌려들어갑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그리스도교가 교권으로 자리 잡을 때 일어납니다. 교회가 말씀과 영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교회권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20세기 초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정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는 교권에 찌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한국교회도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독교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까지 크게 불거진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부도덕성, 분열, 개교회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개교회 안에서도 싸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주먹다짐을 하기까지 합니다.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거액의 돈봉투가 오갔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수년 동안 사법 재판을 받았고,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행태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제자들의 배교와 행간에 들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이제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이구나, 바른 믿음을 지키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제자들처럼 유치하게 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바른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유다의 배신으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배신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유다만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민중들, 그리고 로마 제국이 모두 연루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살해자가 곧 인간입니다. 니체는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제3권 ‘미친 사람’이라는 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미친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것을 너희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의 그리스도교비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 음모를 꾸민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실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그렇게 거창하고 고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허투루 읽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실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나를 팔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각자 “나는 아니지요?” 하고 대꾸한 제자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비겁하고 영악하고 비루한 배신과 변명의 역사를 헤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구원 신비를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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