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희망의 버스’ 타고 영도에 가자

양현모 2011. 5. 31. 22:50

[홍세화 칼럼]

‘희망의 버스’ 타고 영도에 가자

한겨레

 

»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희망의 버스’는 6·10 항쟁 기념일 다음날인 6월11일 오후 6시30분에 떠난다. 출발지는 서울시청 광장 앞 재능교육 비정규직 농성장 앞, 목적지는 부산 영도에 있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밑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오른 지 150일째 되는 날, 매섭게 찼던 바람이 뜨겁게 바뀐 뒤 솔직히 나는 희망보다는 차라리 35m 상공을 우러러보며 열 점 부끄러움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버스를 타려 한다.

 

법원의 강제퇴거 ‘이행강제금’ 결정으로 하루 100만원의 ‘숙박료’를 내야 하는 김진숙은 농성 100일째 되는 날 상추와 치커리, 딸기와 방울토마토를 심었다.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높은 채소재배지가 아닐까. 거기서 멀지 않은 거제에선 대우조선의 강병재씨가 비바람조차 막지 못하는 송전소 철탑에 오른 지 80일을 넘겼다. 이들을 향해 “지독하다”고 말하고 싶은 입이 있다면 그 입을 열기 전에 잠깐이라도 김진숙의 <소금꽃나무>를 읽기 바란다. “한진중공업에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실로 지독한 자는 누구인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소금꽃나무들인가”, 아니면 정리해고한 170명의 연봉을 모두 합친 금액의 세 배에 이르는 174억원의 주식배당금을 나눠 먹은 몇몇 대주주들인가.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애당초 감히 일자리를 옮길 자유를 획득한 하인이었다. 그렇다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노동자로 바꿀 자유가 자본가로선 당연한 권리였다. 이런 평등 논리 아래 자본에겐 인간의 얼굴을 가질 양심이 없었고 정치권력에겐 노동 편에 서는 견제력이 없었다. 1830년대 프랑스의 견직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새벽 5시부터 밤 9시까지 하루 16시간 동안 일해야 했듯이, 그 반세기 뒤 미국의 시카고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했듯이, 그래서 인간의 외침으로 맞서 싸웠을 때 오로지 국가의 탄압만이 그들을 기다렸듯이 말이다. 21세기 한국의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주야 2교대로 일해야 하듯이, 그래서 인간의 외침으로 맞서 싸울 때 오로지 공권력의 탄압만이 그들을 기다리듯이 말이다.

 

한진중공업은 2년간 수주를 못 했다며 정리해고를 정당화했지만 필리핀에 16억달러를 들여 세운 수비크조선소는 지난해에만 선박 23척을 수주해 3년치 물량을 확보했다고 한다. 최근에 일본의 한 경제평론가는 <부자 삼성, 가난한 한국>이라는 책에서 “한국의 대기업들이 특혜는 당연시하면서 국민 이익에는 인색하다”고 비판했다는데, 한국의 참담한 노동현실은 “실질임금 하락이 28개국에서 최고”라는 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은 오히려 한국의 정치지형을 고려하여 <밥, 꽃, 양>과 비정규직법안에서 보듯이, 세계 노동운동이 한 세기 이상 피눈물 나는 투쟁을 통해 획득한 정규직이라는 보루를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자유주의 개혁세력까지 투항함으로써 속절없이 내주었다는 점을 볼 때라야 그 진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그들에게 역사인식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면 본디 자본 편이기 때문일까. 개혁세력이라는 점으로 보면 전자에 가까울 듯하고 자유주의자로 보면 후자에 가까울 듯한데, 그래서 정치통합 논의도 쉽지 않은데, 아무튼 그들이 무엇의 물꼬를 트게 했는지 엠비정권 아래 그 실상이 쌍용자동차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김진숙은 오늘 절벽 앞에 선 한국의 노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박창수와 김주익, 곽재규의 노동자 얼이 서린 곳, 벗들이여 함께 가자. 김진숙이 살아 내려올 수 있도록 그의 외침부터 들으러 가자.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