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노동3권은 시민권이다”

양현모 2011. 4. 15. 22:19

■ 직설잔설 

 반가운 그 말 “노동3권은 시민권이다”

본인은 부담스러워하지만 ‘박변’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었다. 허명을 얻은 사람도 많지만, 박변처럼 내실 있게 명성과 신뢰도를 쌓아온 사람도 없다.

 

나보고 그 많은 일을 언제 다 하느냐는 사람이 더러 있지만, 박변에 비하면 나 바쁜 건 놀고먹는 수준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만이 아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만든 것도 박변이고, 내가 지금도 매달리고 있는 국가보안법, 조작 간첩, 과거사 문제 등을 처음 시작한 이도 박변이고, 거기서 가장 뚜렷한 학술적 업적을 남긴 이도 박변이다.

 

그가 쓴 <국가보안법>(전 3권)과 <야만시대의 기록>(전 3권)은 필독서를 넘어 고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10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확연히 갈라져 있는 점이었다.

 

민주화 이후 우아한 ‘시민’들은 과격한 ‘민중’들과 선을 긋더니 결국 딴살림을 차렸다.

 

노동자 10만명이 머리띠 두르고 팔뚝질 열심히 해도 신문에 한 줄 나지 않는데, 참여연대 회원이 ‘1인 시위’를 하면 세상이 바뀌고 신문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둘은 원래 하나였다.

 

둘이 하나였을 때, 김주익은 피고인으로, 노무현은 변호사로 한 팀이었을 때 그들은 승리했고, 각각 노조위원장과 대통령이 되었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해주던 변호사가 대통령이 될 만큼 세상이 바뀌었는데, 노조위원장은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야 했고, 128일을 버티다가 목을 맸다.

 

대통령이 된 노동변호사는 옛 의뢰인의 죽음에 “이제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기는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도 퇴임 뒤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왜 하나여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그런데 어디서 하나가 되어야 할까?

누가 누구에게로 다가가야 할까?

박변이 노동3권만큼 중요한 시민권이 어디 있냐고 먼저 말한 건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노동자의 시민적 권리를 위해 시민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김주익이 목을 맨 그곳에서 김진숙이 농성 100일을 맞고 있다.

         한홍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