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초과이익공유제, 동반성장기금으로

양현모 2011. 3. 12. 18:10

[기고] 초과이익공유제, 동반성장기금으로 / 백필규
백필규
중소기업연구원 인력기술실장
한겨레
 

 

» 백필규
초과이익공유제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기업과 협력기업 사이에 일정한 목표를 정하고 공동노력을 통해 얻은 성과를 공유하는 성과공유제는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고 실제로도 이미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모기업인 대기업이 연초에 정한 이익을 초과하여 올린 이익을 협력기업과 나누다니….

결론부터 말하면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께서는 좋은 취지의 내용물을 사람들이 딱 오해하기 쉽게 포장해 세상에 내놓았다. 초과이익의 원천이 협력기업에 있다는 논리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수백 수천개에 이르는 협력기업의 기여도 측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불쑥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협력기업에 나누어준다는 이야기만 했다. ‘어설픈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들을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재계는 물론 정계, 학계, 심지어는 주무장관인 지식경제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반대의사를 표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운찬 위원장은 초과이익공유제의 기본취지는 대기업이 목표치를 넘는 초과이익이 발생할 경우 이를 동반성장기금 형태로 출연하여 협력기업의 기술개발이나 고용안정을 돕는 데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았을 것이다.

이 해명에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목표치를 넘는 초과이익이라는 말을 왜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목표이익은 순수하게 대기업이 노력해서 얻은 이익인가? 또 목표치를 넘는 초과이익은 협력기업이 만든 이익과 동의어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목표이익이 아니라 실현이익에 대기업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이익과 협력기업을 쥐어짜서 얻은 이익이 혼재되어 있다. 목표이익을 넘는 초과이익만이 협력기업이 만든 이익이라는 논리적 허점을 가진 주장을 하다 보니 공격을 받는 것이다.

초과이익공유제가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대기업이 얻은 실현이익의 일정비율은 협력기업을 쥐어짜서 얻은 것이니 환원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대기업의 발전이 대기업의 노력만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정부의 특혜나 협력기업 쥐어짜기에 의한 것이 상당부분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대기업이 실현한 이익의 일정비율은 당연히 동반성장기금에 갹출해야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기금 갹출을 통한 협력기업 지원방식은 시장논리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상생협력까지를 요구하는 정부의 ‘팔 비틀기’ 방식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시장친화적인 지원방식이다. 대기업도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반성장기금에 대한 대기업의 부담률은 이익의 일정비율로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다. 이미 상생협력 노력을 많이 하는 대기업이 형평성 차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협력기업에 대한 지원실적이나 불공정거래행위 등을 일정기준에 입각하여 평가하고 등급을 매긴 뒤, 등급별로 동반성장기금을 차등화된 비율로 내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협력기업 지원실적이 양호하면 갹출기금 비율이 낮아지고 열악하면 높아지는 방식으로 설계해서 대기업으로 하여금 협력기업 직접지원 방식과 협력기업 지원기금 갹출 방식을 비교하여 유리한 쪽을 선택하게 하는 방안이다.

갹출된 돈은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까? 좀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기본방향은 대기업의 지원을 받을 기회가 많은 1차 협력기업보다는 그렇지 못한 2차, 3차 협력기업의 발전에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 혁신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보호만 요구하는 한계기업이나 좀비기업이 아닌 끊임없이 혁신하고 도전하는 기업가정신을 가진 협력기업을 제대로 선별하여 지원해야 한다.

이렇게 대기업의 지원으로 협력기업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협력기업의 경쟁력은 서서히 높아질 것이다. 결국은 대기업의 지원이 필요없는 협력기업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날 초과이익공유제는 본래의 사명을 다하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