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우리는 모두 카이스트에 산다

양현모 2011. 4. 13. 19:45

우리는 모두 카이스트에 산다 / 이원재

한겨레
 

 

»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 소장
카이스트에서 네 명의 학생이 연달아 자살한다. 세계적으로 촉망받던 교수 한 명도 자살한다. 학교 쪽은 상담과 심리치료 등의 제도 개선책을 내놓는다. 올해 이야기가 아니다. 1996년 봄 몇몇 일간신문 사회면에 보도된 이야기다. 그 비극이 꼭 15년 뒤인 올해 4월에 똑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반응은 15년 전과 조금 다르다. 일간신문 1면에 이 기사가 연달아 실리고, 다른 학교 교수 및 학생들과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까지 충격과 슬픔에 잠겨 있다. ‘경쟁지상주의 사회의 비극’ 같은 거대담론까지 등장한다. 한국 사회 전체가 카이스트 사태 앞에 깊이 성찰하는 자세다.

15년 전 이 사회는 남의 동네 사건·사고처럼 이 일을 다뤘는데, 왜 지금은 공분하고 슬퍼하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지금 우리는 모두 카이스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15년 전과 달리 지금 카이스트에서 벌어진 일은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대학 나왔고 공부 잘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있는, 서른에서 50대 중반 사이의 당신이다. 지식인, 엘리트,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기도 하고, 중산층이나 화이트칼라라 불리기도 하는 당신. 교수이거나, 언론인이거나, 법조인이거나, 대기업 직원이거나, 자기 사업을 운영하는 당신. 모두는 지금 카이스트에 살고 있다.

뒤처지면 끝이라는 공포가 카이스트 학생들에게만 있었을 리 없다. 잘나가는 기업 다니다가도 한순간에 회사에서 밀려나서는 택시운전, 경비, 청소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사례는 이제 흔하다. 중소기업 사장, 의사, 변호사도 자기 사업에 실패하면 거리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교수도 기자도 법조인도 사명보다는 생존을 먼저 고민한다.

교육 문제로 가면 더욱 심각해진다. 나는 어떻게든 생존하더라도, 내 아이는 부모의 뒷받침 없이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머니 사정은 등록금 차등적용제를 받는 학생처럼 불안하면서도, 대학 영어강의보다 더 낯설고 비싼 영어유치원에 아이들을 보낸다. 자식을 책임지지 못한 부모가 되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부른 행동이다.

‘외국에서는 더 심하게 한다. 글로벌 경쟁을 하려면 이보다 더 열심히 경쟁해야 한다. 늘 잘하던 사람도 한 번 실패하면 재기불능이 될 수 있다. 만일 실패한다면, 원인은 당신의 게으름과 무능이다.’ 카이스트 대학 당국의 목소리는 사실 우리 모두의 귓가에 울리며 공포를 일상화시키는 호통이다. 한 번 뒤처지면 그저 뒤처지는 게 아니다, 바닥 없는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는 공포다.

그러나 이 공포는 당신 혼자 살아남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카이스트 총장을 바꾼다고 누그러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 공포 없는 사회를 위해 세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실패해도 경제적으로 받쳐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일이다. 둘째, 실패가 세대를 넘어서지 않도록 공평한 교육 기회를 모두에게 주는 일이다. 셋째, 상벌 같은 외적 동기보다 신념과 보람 같은 내적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과 학교와 기업을 길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카이스트에 살아서 두렵다. 그러나 카이스트에조차 살지 못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는 훨씬 더 많다. 그들이 자살도 더 많이 한다. 카이스트의 자살률은 10만명당 15명가량이지만,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2009년 현재 31명이다. 노인 자살률은 평균의 두 배가 넘고, 농어촌 지역의 자살률은 대부분 도시보다 훨씬 높다. 초중고생 자살률도 5년 동안 50%가량 높아졌다.

충격받고 분노하고 눈물을 삼키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절망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사회, 생존이 아니라 신념과 보람이 삶의 동기인 사회를 만드는 데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고인들 앞에 무릎 꿇어 용서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