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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고 김근태 상임고문 영결식...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노제

양현모 2012. 1. 3. 19:27

"더 싸우라 채근... 김근태의 병을 잊고 있었다"

[현장] 고 김근태 상임고문 영결식...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노제

김도균 (capa1954) 기자홍현진 (hong698) 기자유성호 (hoyah35) 기자남소연 (newmoon) 기자

민주화 역사에 가장 굵은 글씨로

   새겨질 이름, 김근태

일대기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던

  ” 끔찍한 고문 고발하고 ‘세계의 양심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노무현 대통령과 “계급장 떼고 논쟁”,

   국민연금 주식투자 막아내

하니Only 김종철 기자 메일보내기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정이 모셔지고 있다. 한겨레 사진
이 땅의 민주화가 한두명의 피땀으로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역사에 김근태라는 이름은 가장 굵은 활자로 아로 새겨질 것이다. 김근태(1947~2011)는 암흑의 시기였던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 이끌어온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었다. 온몸으로 역사를 진보시킨 진정한 투사였다.

 그를 운동가로 만든 것은 박정희 독재체제가 낳은 암울한 시대상황이었다. 서울대 상대(경제학과) 3학년 때인 1967년 김근태는 대통령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가 군에 강제로 끌려가면서 저항의 길을 걸었다. 70년 복학한 뒤에는 동기생인 고 조영래, 장기표, 심재권, 손학규 등과 함께 교련반대(1971) 등 학내 시위를 주도했다. 71년 공안당국이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국가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수배받는 처지가 돼, 박정희 정권이 끝나는 1979년 말까지 쫓겨 다녔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김근태는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을 주도함으로써 독재타도 운동의 선봉에 선다. 당시 우리 사회는 1980년 5·18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에 눌려 학생운동도 움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은 ‘민주화의 길’이란 소식지 발간과 각종 집회를 통해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다. 그 중심에는 초대 및 2대 민청련 의장을 맡은 김근태가 있었다.

김근태를 눈엣가시로 여긴 전두환 정권은 1985년 9월4일 구류에서 풀려나 서울 서부경찰서를 나오던 그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곧바로 끌고갔다. 이때부터 김근태를 서울대 학생운동권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와 그 투쟁문건이었던 ‘깃발’의 지도자인 문용식의 배후 인물로 만들기 위한 권력 차원의 조작이 시작됐다. 김근태는 9월25일까지 이근안 등 고문기술자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모두 10차례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고문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문기술자를 돕던 사람조차 김근태가 홀로 남았을 때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고 울먹일 정도였다. 민청련 간부였던 이을호, 김병곤 등도 함께 고문을 당했다. 이을호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김병곤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 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해 12월19일 법정에서 ‘짐승의 시간’을 이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김근태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나 고문 폭로를 위한 법정투쟁에 나섰다. 그는 전기고문 때 발뒤꿈치에 생긴 주먹만한 상처 딱지를 수거해 감옥에 따로 보관했다. 그해 12월13일 접견온 이돈명 변호사와 목요상 의원에게 상처딱지를 건네려했지만, 교도관에 의해 제지당하고 끝내 중요 증거물을 이들에게 빼앗겼다. 망가진 신체를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법원에 낸 ‘신체감정 증거보전’ 신청도 정권의 압력으로 기각당했다.

 그러자 부인 인재근이 투쟁을 이어갔다.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로부터 고문의 실상을 기적적으로 잠깐 들은 인재근은 이 사실을 감옥 밖에 널리 알렸다. 특히 그는 이미자 노래테이프 중간에 고문 내용을 녹음한 다음 이를 미주 한국일보 기자인 심기섭을 통해 해외로 내보냈다. 이 사실은 뉴욕타임즈 등에 크게 보도됐으며,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그 공로로 김근태와 인재근은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87년)을 받았으며, 독일 함부르크 자유재단으로부터는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88년)됐다. 그는 1988년 중반 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민주화와 평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에서 92년까지 다시 구속됐다.


 재야의 대표적 인물이던 김근태는 19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이끌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으며,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서 당선됐다. 이후 17대까지 세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와 당의장, 보건복지부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불의에는 강하되 약자에게는 따뜻한 기품을 유지했다. 항상 진지하고 정직한 그에게 동료들은 “국제신사”란 별명을 붙여줬다. 1999년 백봉 나용균 선생을 기려 제정한 제1회 ‘백봉신사상’에 선정되고, 같은 해 정치부 기자들이 뽑은 ‘차세대 지도자’에도 1위에 올랐다.

하지만, 타협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던 그는 자주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를 얻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치판의 불법 정치자금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2000년 전당대회때 권노갑 고문에게 2천만원을 받았으며, 2억4천만원을 선관위 신고에서 누락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김근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원가 논쟁 때는 김근태는 당시 대통령 노무현과 맞서기도 했다. 노무현이 그해 4월 17대 총선공약으로 열린우리당이 내걸었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시장논리에 어긋난다”며 반대하자 개인성명을 내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정면으로 항의했다. 그해 11월 보건복지부장관 시절 정부의 국민연금 주식투자 동원 움직임에 반대해 김근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해내겠다”며 국민연금 지키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을 휩쓴 ‘반 노무현 정서’와 뉴타운 열풍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김근태는 뉴라이트 출신인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지난 3월 민주당 진보개혁모임을 꾸려 공동대표를 맡는 등 재기를 꿈꿨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2008년의 촛불국민들은 2009년엔 조문 행렬을 이었고 지금은 희망버스를 타야 한다.…운 좋게 내년 2012년에 두 번의 기회가 있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지난 10월18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인 ‘김근태가 살아온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서 노제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 권우성
김근태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하관식이 엄수되는 가운데 부인 인재근씨가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다.
ⓒ 권우성
인재근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하관식이 엄수되고 있다.
ⓒ 권우성
김근태

 

[3신 : 3일 오후 4시 30분]
남양주 모란공원묘지에 안장... "선배의 뜻 영원히 남을 것"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안장됐다.
 
이날 청계천 전태일 다리와 도봉구 쌍문동 민주당 도봉갑 지역위원회 사무실을 거쳐 낮12시 40분경 모란공원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는 상여꾼들의 상여소리를 앞세우고 장지로 향했다.
 
장지로 향하던 운구 행렬은 '모란공원 민주열사 추모비' 앞에서 잠시 멈춰 고인과 먼저 간 동지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관 장소에는 김 고문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과 '2012년 점령하라, 투표하라, 참여하라. 민주주의자 김근태'라는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걸렸다.
 
이용선 민주통합당 공동대표는 하관례에 앞서 "남은 우리가 반드시 선배의 꿈을 이루겠다"며 "선배의 뜻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고인을 애도했다.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은 장영달 전 의원은 '김근태 동지가 남기고 간 유지를 실천하도록 다짐한다"고 말했다.
 
이날 하관식에선 김거성 목사와 태유 스님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추도사와 독경을 했다. 구민교회 김거성 목사는 추모사에서 "고인의 마지막 말처럼 투표로 2012년을 승리의 해로 만들어 내년 1주기 추도식 땐 승리의 기쁨을 나누자"고 말했다.
 
기독교와 불교 추모사가 끝난 뒤 고인이 임종 직전 귀의한 천주교식 하관예절이 진행됐다.
 
하관예절이 진행되는 중 애써 눈물을 참던 부인 인재근씨가 딸 병민씨를 붙들고 오열해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하관식은 추모사와 성가가 이어진 뒤 유족들이 '민주주의자 김근태'라고 적힌 붉은 천을 관 위에 덮고 취토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신 : 3일 오전 11시 55분]
'노동자의 벗' 김근태, 전태일을 만나다
 
  
3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노제가 열린 가운데, 고인의 큰 아들 김병준씨가 영전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근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민주사회장으로 엄수된 3일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가 열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근태

 

 

'노동자의 벗'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유해가 전태일 열사를 만났다. 3일 오전 10시 50분께, 김근태 상임고문의 운구 행렬은 전태일 열사의 동상이 있는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에 도착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전순옥씨가 김근태 고문의 유가족을 맞았다. 장례위원회 측은 "김근태 고문이 노동운동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첫걸음을 하셨다"면서 전태일 다리를 찾은 이유를 밝혔다.
 
전태일 열사의 동상 앞에서 10여 분간 제를 올리는 것으로 노제는 끝이 났다. 김 고문의 자녀인 병준씨와 병민씨가 부인 인재근씨의 곁을 지켰고,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 등 고인과 인연이 깊었던 의원들이 비통한 표정으로 이들 뒤에 섰다.
 
이날 노제에는 시민 50여 명 참석했다. 장지인 마석 모란공원을 향해 떠나는 운구차량을 보며 주양선(42)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천에서 세 아이 그리고 조카와 함께 왔다는 주씨는 "(김 고문은) 신념있고 원칙있는 분이셔서 존경했다"면서 "비록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세를 키우지는 못했지만 그 분의 뜻이 우리 정치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이유에 대해 주씨는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그 분을 본받았으면 해서 데리고 왔는데 아이들이 알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1신: 3일 오전 11시 10분]
김근태 영결미사, 명동성당에서 엄수
 

 

  
3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을 마치고 운구행렬이 성당을 나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근태
  
고 김근태 민주통합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열린 3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 본당에서 운구행렬이 성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김근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3일 오전 8시 30분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미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엄수됐다.

 

함세웅 신부는 이날 미사 강론을 통해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은 생전에 김 고문에게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며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함 신부는 "전기 고문을 당한 김 고문은 그 이전과 다른 내적, 외적 상처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 분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며 "반성하면서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함 신부는 "이 미사를 통해 우리 시대 폭압적인 정권 밑에서 처절한 고문을 당했던 분들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며 "그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말했다.

 

 

이날 영결식에서는 공동장례위원장 지선 스님,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이인영 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조사를 통해 고인을 떠나보내는 애통한 심정을 밝혔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차량이 3일 오전 서울 중구 명당성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청계천 전태일 다리로 향하자, 수많은 추모객들이 고인의 넋을 기리며 운구차량 뒤를 따라가고 있다.
ⓒ 유성호
김근태

지선 스님은 "우리는 당신에게 지도자라는 멍에를 주었으면서도 띠끌만한 힘도 보태주지 못했다"며 "끝내 독재로 회귀한 권력이 온갖 기교와 술수로 세상을 기만하고 있다는 당신의 경고에 귀를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지선 스님은 "김근태 정신은 민주주의는 타협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원혜영 민주통합당 공동대표는 "당신의 그 고통은 우리에게 독재의 그 어둡고 참혹한 시절을 기억하라고,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것임을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역사의 문신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정희 통합민주당 공동대표는 "당신께서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며 "이것은 민주주의의 붕괴, 시민들의 인권침해, 자유와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를, 올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 "당신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2012년 반드시 민주주의를 되찾고 국민의 희망을 살리겠다"고 다짐했다.

 

명동성당을 떠난 고 김근태 고문의 유해는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20분간의 노제를 지낸 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로 옮겨져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된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사위 김동규씨가 3일 오전 서울 중구 명당성당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고인의 영정을 들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청계천 전태일 다리로 향하고 있다.
ⓒ 유성호
김근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식이 열린 3일 오전 서울 중구 명당성당에서 한 시민이 고인의 얼굴이 그려진 걸개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김근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행렬이 3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나서 영결식이 열리는 명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 남소연
김근태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운구행렬이 3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나서 영결식이 열리는 명동성당으로 향하고 있다.

ⓒ 남소연

 

 

 

김근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