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이야기

아빠의 삶 (인생관, 인생철학), 죽음, 사랑에 대한 인터뷰

양현모 2009. 4. 11. 10:42

 

아빠의 삶 (인생관, 인생철학), 죽음, 사랑에 대한 인터뷰  

             (큰딸 양희진)


질문 1 : 아빠의 인생관, 인생철학은 ?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있기까지, 지금의 인생관을 갖기까지의 의미 있는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

아빠의 고향 섬진강변 마을의 비극

아빠는 섬진강변을 끼고 있는 농촌마을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아빠가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모습과 흔적을 가지고 섬진강과 함께 숨 쉬고 있는 평온한 마을이다. 지금도 물장구치고 다슬기잡고, 메기 잡고 뛰놀 수 있는 우리들의 고향땅이다. 그러나 이런 아빠의 고향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태어나서 백년언약을 맺으신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족상전의 비극을 몰고 온  6,25전쟁이 평화로운 이곳을 피로 얼룩지게 한 비극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깊은 산골짜기로 둘러싸인 이곳은 회문산과 성미산이 마주보고 있어서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들이 빨치산이라는 이름으로 회문산에서 은거하면서 성미산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그래서 이곳 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국군의 감시와 통제 속에 살아야했고, 밤에는 어쩔 수 없이 빨치산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생존의 법칙을 배워야 했다. 때로는 국군에게도 죽음의 위협을 수십 번 느끼며 살아야 했고, 정찰기가 뜨면 산에 파놓은 토굴 안에서 배고픔을 견디며 몇날 며칠을 지내야 하는 고단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씀을 전해 들으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니 전쟁의 비극이 국민들의 삶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이렇듯 전쟁의 상혼이 묻어있는 섬진강변 작은 마을에서 어둠이 내리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아빠는 이 땅에 첫 울음소리를 쏟아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님께서 노래했던 바로 어머니 품 같은 고향땅이다.

 


보릿고개와 아빠의 성장기

아빠는 육남매 중 셋째 장남이다. 할아버지는 섬진강 농촌 마을을 떠나서 철도 일을 하는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정근 발령이 난 바람에 자주 이사를 해야 했으며 주로 철도역 주변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는 배고픔을 모르지만, 현재 50세 이상 되신 분들은 보릿고개를 피해갈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마디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가 되었던 시절이다. 당시 공무원들은 월급대신 밀가루나 옥수수가루를 배급받아 겨우 끼니를 이어가야만 했다. 아빠는 아래 남동생(삼촌) 둘과 함께 10리를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생계에 보탬을 주기위해서 막노동부터 동네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식들을 돌볼 새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먹고 남은 보리밥을 바구니에 담아서 바람이 통하는 처마 밑에다 걸어 놓은 면, 학교에 다녀온 아빠와 삼촌들이 바구니를 내려서보면 달랑 보리밥 한 그릇이었다. 아빠는 보리밥 한 그릇으로 동생 둘과 끼니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보리밥을 죽으로 끓여서 세 그릇을 만들어 먹는 지혜를 발휘했다고 한다.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월급대신 받아온 밀가루로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다. 아빠가 지금도 잡곡밥을 싫어하고 하얀 쌀밥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보릿고개시절의 아픔과 고통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가 한창 학업에 열중하고 꿈을 키워나갈 때 할아버지는 잘나가던 공무원 생활을 갑자기 그만 두셨다. 아무런 대책 없이 할아버지가 실업자신세가 되다보니 유일한 생계수단이 끊겨 버렸고 아빠를 포함한 가족들은 가난하고 힘 든 고난의 생활이 시작됐다. 할아버지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아빠는 이런 상황에서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으며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생전 처음 밟아본 서울 땅에서 시작한 것은 허리띠 바클이나 여러 가지 장식들을 만드는 영세 금형조립공장이였다. 당시 서울 마포나 영등포에는 주택 지하실이나 판자집이 움집한 곳에 기계 몇 대 제품을 생산하는 영세업체들이 줄지어 있었다.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놀기 때문에 돈을 번다는 것은 거의 힘든 시절이다 또한, 일을 하고도 돈을 받기 어렵고 오히려 사장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 비인간적인 70년대 상황이다. 그래서 아빠가 당시에 했던 일은 자신의 몸을 방어하기위한 운동이며, 틈틈이 노동관련 서적을 구해서 보거나 신문에 난 노동문제 등을 스크랩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얼마나 당시의 처절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아빠의 군대생활

아빠는 틈틈이 배운 태권도를 통해서 당시에 암울했던 노동현장의 탈출구로 삼았다. 그래서 체육관에 기거하면서 청소도하고, 유아반과 중고등부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에는 태권도 사범들의 해외진출도 많았고 태권도 도장이 미술이나 음악학원과 함께 유치부를 지도하는 체육관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빠의 꿈은 태권도와 함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로서 국가의 4대의무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를 피해갈 수 없었다. 78년 3월 아빠는 최전방 중동부전선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북에서 들려오는 북한군들의 대남방송과 음악소리를 들으며, 155마일 철책 선을 지키는 초병의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해야 했다. 겨울에는 눈에 고인 액이 얼어붙을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날씨에 12시간이 넘는 철책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넘어지면 못 일어날 정도로 옷을 끼어 입고 근무를 해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대통령 서거소식이 차가운 새벽공기를 뚫고 북쪽에서 내보낸 대남방송에서 흘러나왔다. 당시 정치상황에 따라서 최전방 군인들은 전쟁 상황과 같은 긴박하고 초긴장 상태에서 근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왜곡된 5.18광주 민주화 항쟁과 삼청교육대 희생자들의 고통의 역사를 지켜봐야만 했다.

 


대우조선 입사와 노동조합 활동

군대를 제대한 아빠는 82년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에 공채로 입사하게 된다. 아빠는 대우조선의 상징처럼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골리아스크레인을 바라보며, 당시 대우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우중 회장과 비교하곤 했다. 김우중 회장은 노동자들이 평생 넘지 못할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시절이다. 진수식이나 인도식 때면 김 회장은 요란한 헬기소리와 함께 정부의 고위층을 대동해서 조선소를 방문했다. 때로는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군부독재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식이 끝날 때까지 무장경호원들이 조선소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노동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이며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김 회장은 그렇게 먼발치에서도 보기 힘든 권력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87년 6월 이한열열사가 폭력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6월항쟁으로 폭발했으며, 마침내 6.29선언을 통 해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 냈다. 구로에서 거제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거대한 물결처럼 전개됐다. 당시 대우조선도 일손을 멈추고 노조설립투쟁을 전개했다. 아빠는 처음으로 김우중을 규탄하는 구호와 함께 노조설립투쟁에 동료들과 참여했다. 우상처럼 생각해왔던 김 회장이 한순간에 적대적 관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노조설립투쟁과정에서 김 회장의 면담을 요구하고 백골단과 대치하며 격렬하게 전개된 옥포사거리 시위도중 아빠는 사랑하는 고향후배를 백골단이 쏜 직격최루탄에 잃어야 했다.


아빠는 김 회장과 자본에 대한 분노를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외쳤던 김 회장에 대한 규탄구호에서 느끼지 못했던 설움과 울분을 억누르며 아빠는 이석규열사가 잠들어 있는 영안실을 지켜야 했다. 영안실을 지키면서 아빠는 얼마 전 서거하신 노무현대통령(당시 변호사) 을 비롯해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여사, 성고문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씨등 재야인사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빠의 인생관과 목표가 설정된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고향후배인 이석규열사의 희생으로 설립된 노동조합 활동을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활동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아빠는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핵심활동가로서 집행부의 정책실장과 대의원, 민주노총 초대 중앙위원과 대의원, 그리고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진보적 활동을 지금도 활발하게 전개 하고 있다. 그러나 아빠가 대우조선 노동활동가로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빠가 기고한 노동관련 서적에서 발췌한 글 일부를 통해서 알아보자.


<중략>

신경영전략을 통한 노동통제 관리방식

강성노조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김 회장은 대우조선 사장을 맡아 직접 경영일선에 나섰다. 당시 김회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주변의 시선을 끌면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자전거를 타고 작업장 순회하기,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교육에 늦게 참석한 교육생과 바꿔차기, 일반 중국음식점에서 식사하기, 불시에 현장 노동자의 집 방문하기 등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던 현장의 헤게모니를 순식간에 김 회장이 잠식해 버린 것이다. 그 후 김 회장은 대우조선경영에 대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은 대표단을 구성하여, 정치권과 정부를 상대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바로 ‘회사살리기’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노력이 통했는지 정부는 대우조선에 2천억원의 특혜금융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특혜금융을 지원받은 김 회장은 ‘희망 90s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전 종업원교육과 계열사 견학, 가족문화여행 등을 실시했으며, 한편으로는 노동통제 관리방식에 의존한 ‘신 경영전략’으로 현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교묘한 방법으로 노조활동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노조활동가들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현장조합원과 차별하고 분리하는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집행부는 이러한 회사의 치밀한 노동통제를 극복하기 위해 ‘골리아스 투쟁’을 전개했다. 대우조선노동조합의 골리아스투쟁은 현대중공업의 골리아스투쟁과 함께 노동운동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후 지도부 구속과 대대적인 현장활동가 탄압으로 이어지면서 현장은 회사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회사의 신경영전략은 더욱 현장을 통제하면서 활동가위주의 관리방식에서, 현장조합원들을 노동조합과 분리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파업참여자에 대한 불이익 처우에서 이제는 자발적인 집회참여까지 체크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위축시켜 나갔다. 그리고 각종 선거와 투표에서 조합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통제가 가능해 진 것이다. 현장 활동가들은 구속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조합 활동 자체가 고통스런 시기였다. 집회를 개최해도 조합원들은 회사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참석하지 않았다. 소수활동가 위주의 집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95년 6월 21일 당시 41세의 박삼훈 열사는 신 경영전략의 희생자가 됐다. “노동자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아보자...  집회참석도 못하게 하는 관리자...  노동자가 단결하여 올 임금 100% 쟁취하자!”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음으로 회사의 노동통제정책에 항거하고 조합원들의 단결과 각성을 촉구했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200억달러 규모의 유동성 조절 자금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초국적 자본이 요구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리해고위협에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법개악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노동조합도 투쟁을 전개하면서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지만 현장조합원들은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림 열사는 2월 13일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조합원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유서를 뿌리고 1도크에서 건조중인 선박의 선수 갑판위에서 분신 후 도크바닥으로 투신하여  운명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다.

IMF관리체계는 유동성위기에 몰린 대우그룹을 그냥두지 않았다. 당시 김 회장은 자본을 대표하는 전경련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대우그룹을 국내 재벌기업순위 2위에 올려놓았다.

열사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전국에서도 악명 높은 대우의 노무관리 수법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예전에는 옥포 만에 헬기가 뜨면 “김 회장이 돈 보따리 가지고 온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부도나기 얼마 전부터는 헬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 “김우중이가 돈 가지러 왔다”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99년 대우그룹은 유동성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2개 주요계열사가 일제히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대우부도사태’를 맞았다. 당시 대우그룹은 98년 기준으로 국내계열사 41개, 해외법인은 396개에 달했다. 자산은 83조원이며 매출은 62조원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세계경영’의 결과가 불법, 탈법경영으로 나타났으며, ‘대우가족’이라고 불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고통을 당한 것이다.

 

대우그룹 계열사들의 희생을 위해 주요기업에 29조7천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며, 김 회장은 대우그룹 자구노력차원에서 대우조선을 포함한 주요계열사에 대한 매각을 발표했다. 노동조합은 즉각 “매각반대투쟁”을 조직하고 파업투쟁을 선포하고 대응투쟁을 전개했지만 채권단 관리와 지배를 받게 된 대우조선은 채권단이 요구한 ‘기업개선약정서’에 동의하는 굴욕적인 서명을 하여야 했으며, 지금까지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어 오고 있는 상황이다. 대우조선노동자들은 임금동결과 일부 복지제도가 후퇴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회사의 물량외주화 및 분사정책 등으로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통과 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이 부도낸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피 땀 흘려 노력한 결과 대우조선은 2년만에 워크아웃으로부터 조기 졸업하게 됐으며, 회사는 해마다 최대 경영실적을 자랑하며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회사의 눈부신 성장 뒤에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다. 99년 당시 대우조선 매출액은 2조원 대에서 현재13조원대로 6배이상 급성장했다.

 

1999년 10월 대우그룹 부도 후 잠적했던 김우중 회장이 지난 2006년 6월 14일 새벽, 5년 8개월간의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여 검찰에 연행됐다. 검찰에 연행된 김우중 회장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김우중 회장은 더 이상 나에게는 넘지 못할 거대한 산도 아니고, 꼭 극복해야 할 목표도 아닌 범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김우중씨가 저지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매각이라는 태풍의 위협 속에 놓여있다. 지난 1년간 정부와 산업은행이 추진하는 도발적인 매각진행에 맞서서 투쟁을 전개하여 소중한 일터를 지켜냈지만, 언제 또다시 매각의 태풍이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을 휘두르며 대우조선 구성원들을 위협할지 모른다. 지금은 경제위기상황이라는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려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 속에 09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대우조선의 미래와 구성원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해서 김우중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한 열사들의 정신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결론)

아빠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정의 행복과 평화를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포기하고 변절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첫째는 가정을 지키지 못함이요, 둘째는 권력과 자본에 굴복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를 평생의 동지요 반려자라고 한다. 만약에 엄마의 협조가 없었다면 과연 아빠는 남이 하지 않은 힘들고 어려운 길과 굴곡진 세월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진보의 가치를 최우선과제로 추구하는 아빠의 삶이 아빠의 과거의 성장기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아빠가 살아가는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할아버지의 잘못된 선택 을 아빠는 평생 반면교사로 삼고 할아버지의 실패한 삶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쓰신다. 아빠는 가장으로서 가족과 가정을 지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하지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노동자로서의 소중한 권리와 삶, 그리고 아빠의 진정한 진보주의를 사랑한다. 현 시기 보수정권하에서 고용 없는 성장과 개발, 국민과의 의사소통의 문제, 남북관계의 긴장 속에서 민심통제 상황은 우리들이 누려야 할 민주주의를 긴 어둠의 터널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고 환경을 사랑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노동자의 소득을 높이고 고용을 촉진하여 내수경제를 살리고 사회복지를 강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진보의 가치가 아닐까? 


 

 

 

질문 2 :  아빠의 러브스토리

<엄마 뿐만이 아닌 부모님, 친구들, 자식들, 또는 회사 안에서 같은 뜻을 품고 사는 사람들 까지 모두의 러브스토리.>

☞서로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자

만원의 가치와 위력

아빠는 1982년 25세의 나이로 할아버지가 차비하라고 주신 10,000원짜리 한 장을 가지고 거제대교를 넘으셨다고 한다. 당시 만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상상이 가지 않으나, 아빠가 만원으로 거제도 오는 버스 차비를 하고, 친구만나서 술 한잔 하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버티셨다니 당시 만원의 가치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주신 만원은 아빠의 28년 회사생활을 지탱하게 한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아빠 말씀대로 “결혼하고 자식을 셋이나 낳아서 대학교육까지 시키고, 집과 자가용이 있으니 만원으로 수만 배 뻥튀기를 한샘이다” 그래서 아빠는 가정의 행복을 항상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려 애쓰고 있다. 자식들에 대한 아빠의 애정표현은 엄격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가부장적인 냄새를 풍기는 편이다. 가정에서의 아빠의 권위를 내세우며, 쉽게 자식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아빠의 그런 마음속에는 아마 아빠가 걸어온 길에 비하면 자식들이 너무 세상물정을 모르고 가난이라는 고통과 걱정 없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는 것이 내심 불만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아빠가 걸어오신 고난의 길을 자식들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보호본능이 엄격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엄마와의 만남 그리고 결혼

아빠는 솔직히 눈이 높아서 웬만한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아빠도 여러 곳에서 중매가 들어와서 서울까지 가서 선도 보고 했지만 번번히 퇴짜를 놓고 오는 오만(?)을 부렸단다. 그러면 아빠는 어떤 여자스타일을 원했을까? “동양적 인 순수함과 미”를 갖춘 여자라고 한마디로 표현한다. 이상형보다는 현실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주요 고려대상이였다. 그런 아빠가 외할머니 친구(아빠 고향 동네 아주머니)의 소개로 엄마와 선을 보게 됐다. 85년 7월29일 한여름 햇볕에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과 피부색을 가진 모습으로 여름휴가를 나온 엄마와의 첫 대면은 순조롭지 않았다. 엄마도 수십 번 선을 보고 많은 남자들을 울린 경력(?)이 있는 터라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이다. 선본자리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갈려고 하니 아빠의 마음과 구겨진 자존심은 어떠했겠는가? 선본 뒤로 아빠는 수십 통의 편지를 보냈으나 엄마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인연이 아니라고 판단한 아빠는 그해 추석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에게 다른 곳에 맞선을 부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아침 중매를 섰던 동네 아주머니한테 연락이 왔다. 한번 더 보자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가 계신 전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엄마와 재회를 했고, 둥근 보름달이 떠오른 덕진공원에서 ‘프로포즈’를 하여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이다.

 


멋진 사랑 한번 해봤더라면~~~

TV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엄마는 아빠에게 “나도 저렇게 멋진 사랑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그러나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TV만 응시하면서 은근한 질투심을 억누른다. 아빠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가정경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엄마가 겪는 고통은 당연히 수반됐다. 그러나 엄마는 돈 없고 빽 없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뛰어다니시는 아빠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가져다 밤새 일을 했으며, 막내 동생 희동이를 임신했을 때는 임신한 몸으로 주간신문을 돌리셨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아빠는 “엄마가 불쌍하기도 하고 남편을 잘못만나 고생한다”는 생각에 아무도 없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막내동생 희동이가 태어나자 우리 식구는 다섯이 되었다.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삼성생명 설계사로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한 살짜리 희동이를 등에 들쳐 업고 이집 저집 초인종을 누르며 앙케이트 조사도하고 상품도 설명했지만, 설계사의 길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문전박대 당하기 일수이고, 두시간 세시간 밥도 거르면서 상품을 설명 해놓으면 다음에 하겠다고 돌아서면 맥 풀린 허전한 발걸음을 이끌고 막연한 걸음을 재촉하는 세월이 였다. 운전을 할 줄 모르는 엄마는 양손에 보따리를 들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추운 겨울에는 시린 손을 불어가면서 모진세월을 감내하며 버텨냈다. 오직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지금은 차도 손수 운전하면서 어엿한 팀장님이다. 이런 엄마를 아빠가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빠는 우리집 가훈을 “서로사랑하며 아름답게 살자!”로 정하고 거실 벽면에 걸어놓았다. 어렵사리 이어온 가정의 행복을 지키고 유지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못 다한 사랑을 두 분이 영원토록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질문 3 : '죽음'에 대한 아빠의 생각

<앞으로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_>

☞한줌에 흙이 되어 새싹을 틔운다

노무현의 삶과 죽음

아빠는 최근 노무현 전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충격을 많이 받았다. 아빠와 노무현 전대통령과의 인연은 87년 노동조합 설립과정에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 후 노동조합 활동과정에서 몇 번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참여정부시절 집권당 부총재 자격으로 대우조선 노동조합을 방문했을 때 아빠가 영접했다고 한다. 당시 수행비서인 백원우씨가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과정에서 이명박대통령 내외가 헌화하려고 할 때 “사죄하라!”고 고함친 사람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의 의미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분석이 가능하지만, “자신의 몸을 던져서 진실을 말하려 했고 민주주의를 구하려 했다”는 것이 아빠의 시각이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업적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땅의 차별과 권위주의와 권력과 맞서서 평생을 싸우면서 힘든 길을 걸어왔다. 경상도 사람이면서 전라도사람을 사랑하고 전라도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통령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는 유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죽음은 두렵지만 극복의 대상

 

오래 살겠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생각이다. 아빠도 “120살 까지 살겠다”는 말씀을 평소에 많이 해왔다. 아빠는 회사생활을 통해서 많은 죽음을 접해왔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죽음으로 자본권력에 항거한 열사들, 일을 하다가 산업재해로 숨져간 산업전사들, 그리고 개인 질병으로 숨져간 동료들, 죽음은 우리주변에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죽는다는 것은 두렵고 힘든 과정임에 틀림없다. 오죽하면 “죽을 각오로 살아라!”고 하겠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왕 죽음을 받아드린다면 아빠는 의미 있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한줌의 흙이 되어 새싹을 틔운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기꺼히 맞이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다.

 

 

 

 

 

 

 

 

 

 

 

 

블로그 개설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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