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이야기

열사와 함께 한 노동조합의 역사

양현모 2010. 7. 3. 12:32

 

        열사와 함께 한 노동조합의 역사



                                                                                    대우조선노동조합 정책기획실장 양현모


노동조합활동의 시작

82년 대우조선에 입사한 나는 대우조선의 상징처럼 버티고 있는 거대한 골리아스크레인을 바라보며, 당시 대우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우중 회장과 비교하곤 했었다. 김우중 회장은 내가 평생 넘지 못할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던 시절이다.

진수식이나 인도식 때면 김 회장은 요란한 헬기소리와 함께 정부의 고위층을 대동해서 조선소를 방문했다. 때로는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군부독재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조선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인도식이 끝날 때까지 무장경호원들이 조선소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노동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숨소리를 죽이며, 행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김 회장은 그렇게 먼발치에서도 보기 힘든 신비스런 존재였다.


그러나 나는 김 회장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87년 6월 이한열열사가 폭력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6.29선언이라는 정권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6.29선언이후 구로에서 거제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됐다. 당시 대우조선도 일손을 멈추고 노조설립투쟁을 전개했다. 나는 처음으로 김우중을 규탄하는 구호와 함께 노조설립투쟁에 동료들과 참여했다. 우상처럼 생각해왔던 김 회장이 한순간에 적대적 관계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노조설립투쟁과정에서 김 회장의 면담을 요구하고 백골단과 대치하며 격렬하게 전개된 옥포사거리 시위도중 나는 사랑하는 후배를 백골단이 쏜 직격최루탄에 잃어야 했다.


이석규 열사!

김 회장에 대한 분노를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막연하게 외쳤던 김 회장에 대한 규탄구호에서 느끼지 못했던 설움과 울분을 억누르며, 석규가 잠들어 있는 영안실을 지켜야 했다.

넘지 못할 거대한 산처럼 생각했던 김 회장을 꼭 극복해야 할 목표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김 회장이 석규의 빈소를 찾아온 것이다. 내가 김 회장을 실제로 첫 대면을 한 날이다. 석규의 죽음으로 원망스러웠던 김 회장이 석규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그는 인간 김우중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나는 순간 엄청난 혼란스러움에 빠져들기 시작했으며, 김 회장을 원망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 후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과 함께 대우조선 노동조합은 설립됐다.


89년 나는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노동조합은 임단투를 진행했다. 임단투 진행과정에서 초대 집행부의 어용성이 드러났고 회사의 노조방해공작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집행부 불신임투쟁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중심으로 현장조직은 ‘민주대 반민주’의 구도로 급속하게 개편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장조직에 위기감을 느낀 회사는 구사대조직인 상록회 가입을 강요했으며, 이에 분개한 박진석, 이상모 열사가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모 열사는 “경영자란 놈이 생각하는 것이 노동자탄압과 자신의 명분을 위해 살아간다면 노동자는 이 땅의 노예밖에 더 되겠는가? 친구들아! 너희들은 원직복직 임금인상 확실하게 쟁취할 수 있는 노동자의 앞에 나가기 바란다.”는 유서를 남겼다.


신경영전략을 통한 노동통제 관리방식

강성노조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웠는지 김 회장은 대우조선 사장을 맡아 직접 경영일선에 나섰다. 당시 김회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주변의 시선을 끌면서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자전거를 타고 작업장 순회하기,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교육에 늦게 참석한 교육생과 바꿔차기, 일반 중국음식점에서 식사하기, 불시에 현장 노동자의 집 방문하기 등 노동조합이 장악하고 있던 현장의 헤게모니를 순식간에 김 회장이 잠식해 버린 것이다.

그 후 김 회장은 대우조선경영에 대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조합은 대표단을 구성하여, 정치권과 정부를 상대로 도움을 요청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바로 ‘회사살리기’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런 노동자들의 노력이 통했는지 정부는 대우조선에 2천억원의 특혜금융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특혜금융을 지원받은 김 회장은 ‘희망 90s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전 종업원교육과 계열사 견학, 가족문화여행 등을 실시했으며, 한편으로는 노동통제 관리방식에 의존한 ‘신 경영전략’으로 현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교묘한 방법으로 노조활동가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노조활동가들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현장조합원과 차별하고 분리하는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집행부는 이러한 회사의 치밀한 노동통제를 극복하기 위해 ‘골리아스 투쟁’을 전개했다. 대우조선노동조합의 골리아스투쟁은 현대중공업의 골리아스투쟁과 함께 노동운동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후 지도부 구속과 대대적인 현장활동가 탄압으로 이어지면서 현장은 회사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회사의 신경영전략은 더욱 현장을 통제하면서 활동가위주의 관리방식에서, 현장조합원들을 노동조합과 분리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파업참여자에 대한 불이익 처우에서 이제는 자발적인 집회참여까지 체크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일상적인 노동조합활동을 위축시켜 나갔다. 그리고 각종 선거와 투표에서 조합원들의 자유로운 의사통제가 가능해 진 것이다. 현장 활동가들은 구속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며, 조합 활동 자체가 고통스런 시기였다. 집회를 개최해도 조합원들은 회사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참석하지 않았다. 소수활동가 위주의 집회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95년 6월 21일 당시 41세의 박삼훈 열사는 신 경영전략의 희생자가 됐다. “노동자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아보자...  집회참석도 못하게 하는 관리자...  노동자가 단결하여 올 임금 100% 쟁취하자!”라는 유서를 남기고 죽음으로 회사의 노동통제정책에 항거하고 조합원들의 단결과 각성을 촉구했다.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IMF에 200억달러 규모의 유동성 조절 자금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관리체제로 들어갔다. 초국적 자본이 요구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리해고위협에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당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노동법개악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노동조합도 투쟁을 전개하면서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했지만 현장조합원들은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대림 열사는 2월 13일 ‘정리해고 저지투쟁’에 조합원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유서를 뿌리고 1도크에서 건조중인 선박의 선수 갑판위에서 분신 후 도크바닥으로 투신하여  운명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다.

IMF관리체계는 유동성위기에 몰린 대우그룹을 그냥두지 않았다. 당시 김 회장은 자본을 대표하는 전경련회장을 맡고 있었으며, 대우그룹을 국내 재벌기업순위 2위에 올려놓았다.

열사들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전국에서도 악명 높은 대우의 노무관리 수법으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만들어낸 결과인 것이다. 예전에는 옥포 만에 헬기가 뜨면 “김 회장이 돈 보따리 가지고 온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부도나기 얼마 전부터는 헬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 “김우중이가 돈 가지러 왔다”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99년 대우그룹은 유동성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2개 주요계열사가 일제히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대우부도사태’를 맞았다. 당시 대우그룹은 98년 기준으로 국내계열사 41개, 해외법인은 396개에 달했다. 자산은 83조원이며 매출은 62조원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세계경영’의 결과가 불법, 탈법경영으로 나타났으며, ‘대우가족’이라고 불리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고통을 당한 것이다.


대우그룹 계열사들의 희생을 위해 주요기업에 29조7천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며, 김 회장은 대우그룹 자구노력차원에서 대우조선을 포함한 주요계열사에 대한 매각을 발표했다. 노동조합은 즉각 “매각반대투쟁”을 조직하고 파업투쟁을 선포하고 대응투쟁을 전개했지만 채권단 관리와 지배를 받게 된 대우조선은 채권단이 요구한 ‘기업개선약정서’에 동의하는 굴욕적인 서명을 하여야 했으며, 지금까지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어 오고 있는 상황이다. 대우조선노동자들은 임금동결과 일부 복지제도가 후퇴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회사의 물량외주화 및 분사정책 등으로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통과 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이 부도낸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이 피 땀 흘려 노력한 결과 대우조선은 2년만에 워크아웃으로부터 조기 졸업하게 됐으며, 회사는 해마다 최대 경영실적을 자랑하며 초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회사의 눈부신 성장 뒤에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다. 99년 당시 대우계열 상장사 시가총액은 2조원대였지만 지금은 11조원대로 5배이상 성장했다. 대우조선 매출액도 2조원 대에서 7조원대로 급성장했다.


1999년 10월 대우그룹 부도 후 잠적했던 김우중 회장이 지난 2006년 6월 14일 새벽, 5년 8개월간의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여 검찰에 연행됐다. 검찰에 연행된 김우중 회장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김우중 회장은 더 이상 나에게는 넘지 못할 거대한 산도 아니고, 꼭 극복해야 할 목표도 아닌 범죄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김우중씨가 저지른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열심히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매각이라는 태풍의 위협 속에 놓여있다. 대우조선도 내년에 매각이 예상되고 있다. 노동조합은 현재 ‘매각대책위’를 구성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우조선의 미래와 구성원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해서 김우중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한 열사들의 정신으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2007년 5월 열사들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