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사랑

드골의 나라 노무현의 나라

양현모 2010. 10. 25. 21:14






 

 


윈스턴 처칠은 지난 9월 초 2,025명의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2차대전 이후 가장 뛰어난 총리로 뽑혔다. 처칠이 좋은 총리였다고 응답한 영국인은 79%로 5명 중 4명꼴이었다. 2위는 대처(47%), 3위는 블레어(39%)였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까지 감안하면 처칠에 대한 영국인의 호감도는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처칠이 나쁜 총리였다고 응답한 영국인은 4%에 그쳤지만 대처와 블레어는 각각 40%와 47%의 영국인으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결국 처칠은 종합 호감도에서 100점 만점에 75점을 받았고 대처는 겨우 7점을, 블레어는 마이너스 8점을 받은 셈이었다.

처칠은 몇 해 전 BBC 여론조사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국인 2위로 뽑혔다. 1위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었다. 단순히 2차대전 이후가 아니라 영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처칠은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3대 대통령은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공황과 이차대전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다. 특히 대공황을 능가하는 심각한 금융 위기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과감한 공공정책으로 서민을 보듬어 안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향수를 느끼는 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 루스벨트는 2010년 시에나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미국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러나 자국민으로부터 국난을 극복한 최고 지도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변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는 누가 뭐래도 샤를 드골이다. 프랑스인이 드골을 가장 존경한다는 것은 여론조사를 한다는 것이 시간 낭비일 만큼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2005년 드골은 이미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으로 선정되었다.

프랑스인 사이에서 드골은 le general로 통한다. le는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한다. 단 하나뿐인 장군, 유일무이한 장군이라는 뜻이다.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맥없이 무너지고 남부 프랑스의 비시에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친독 정권이 들어서자 영국으로 망명하여 자유프랑스 임시정부를 세우고 프랑스의 수반으로서 열악한 물질적 상황에서도 처칠, 루스벨트에게 조금도 기죽지 않고 프랑스의 국익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고 1944년 프랑스군을 이끌고 파리로 들어와 조국을 해방시켰다.

같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지만 영국이 프랑스의 식민지를 가로채려고 한다고 믿었던 드골은 적수인 독일보다 우군인 영국을 더 미워해서야 되겠느냐고 처칠 부인이 애정을 가지고 충고하자 “프랑스는 친구 따위는 없고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고 쏘아붙였다. 드골은 평생 조국 프랑스의 이익만을 생각한 지도자였다. 드골주의는 그런 드골의 조국 수호 정신을 추종하는 드골의 지지자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아무리 자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영국에는 처칠주의는 없고 미국에도 루스벨트주의는 없다.

드골을 짓밟는 우익 지도자는 프랑스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드골주의 정당은 특정 정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드골주의는 프랑스 우익 정당이 국민으로부터 표를 얻기 위해 드골의 노선을 따르겠다는 약속의 상징으로 내거는 이름이다. 드골주의는 애국의 보증수표다. 드골은 죽었지만 드골의 조국애는 프랑스의 등뼈로 건재하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전쟁이라는 국난을 맞아 탁월한 지도력을 보였다는 점 말고도 살아생전에 자기 나라 국민으로부터 충분히 인정을 받았고 모두 자연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처칠은 1965년 런던 하이드파크 근처에 있던 자택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90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루스벨트는 유럽 전선에서 승리가 거의 굳어지던 상황에서 격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찾은 요양지에서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급성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드골은 1970년 고향 집에서 자서전을 집필하다가 80세 생일을 두 주일 앞두고 심장마비로 의자에 앉은 채로 죽었다.

최근 <시사저널>이 30개 분야 전문가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여론조사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이 1위(11.7%)로 뽑혔다. 2위는 고 김대중 대통령(9.5%), 3위는 박정희(9.2%), 4위는 김구 주석(6.4%)이었다.

우리 시대의 영웅으로 뽑힌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상해에서 임정 수반으로 대일 항쟁을 벌이면서 풍찬노숙했던 김구 주석은 친일 세력에게 암살당했다.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서 충격을 받고 심신이 급격히 쇠약해졌으므로 자연사라고 보기가 어렵다.

드골이 프랑스를 탈환한 뒤 독일에 부역한 언론인을 응징한 것은 단순히 4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프랑스 언론인들의 행태에 분노해서만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변변히 저항 한번 못해보고 맥없이 무너진 것은 이미 1930년대부터 프랑스 언론이 썩을 대로 썩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투’를 건네는 정치인에게는 우호적인 기사를 써주고 언론에 굽실거리지 않는 정치인에게는 공갈 협박으로 돈을 갈취하는 것이 제3공화국 시절 프랑스 언론의 관행이었다.

우익 언론은 빨갱이 사냥에는 광분하면서 독일이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를 지원하면서 벌인 게르니카 학살은 모른 척했다. 게르니카 학살의 책임이 독일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프랑스인은 10명 중 3명도 안 되었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익 언론은 자기들 요구를 100퍼센트 안 들어주는 정부는 무조건 사이비 정권으로 몰아붙였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맞서려고 했던 레옹 블룸 정부에게 우익 언론은 왜 프랑스를 다시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느냐고 악을 썼고 좌익 언론은 민생이나 챙기라며 비아냥거렸다.

프랑스의 등뼈는 이미 무책임한 좌우 언론이 말아먹은 지 오래였다. 등뼈가 녹아버린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진 것은 당연했다. 드골은 프랑스의 등뼈를 다시 세우려면 언론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나마 항독 투쟁 과정에서 친독 프랑스 신문들의 악선전에 시달리던 드골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알베르 카뮈 같은 작가가 찍어내던 <콩바>(전투) 같은 레지스탕스 신문이었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눈에 띄면서 이기면 생색나는 전쟁을 벌이면서 영웅이 되었지만 노무현은 눈에도 안 띄고 이긴다 하더라도 생색이 안 나고 욕만 먹기 십상인 전쟁을 혼자서 외롭게 벌였다. 그것은 언론과의 전쟁이었다. 아니,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국민의 이익을 언제나 최상의 가치로 섬겼던 노무현은 공권력과 언론이 건강한 긴장관계를 맺는 것이 국민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고 보았기에 공직자에게 언론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당당한 처신을 요구했고 언론권력에게는 사실에 입각한 정당한 비판을 요구했을 뿐이다. 기자실이라는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 말고는 이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음습한 언론권력 담합의 해체를 요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민의 이익보다는 사익과 자기 밥그릇이 언제나 우선인 한국의 언론은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물어뜯었다.

그러나 노무현의 육신은 물어뜯을 수 있을지 몰라도 노무현의 정신은 물어뜯을 수가 없다. 노무현은 <시사저널>과 미디어리서치가 얼마 전에 실시한 별도의 여론조사에서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에 뽑혔다. 또 <한국대학신문>이 200개 대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벌인 정치인 선호도 조사에서도 1위로 뽑혔다. 처칠, 루스벨트, 드골은 타국과 싸워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에 타국과의 전쟁이 일단락된 상황에서는 세월이 흐르면 잊힐 수밖에 없지만 노무현은 다르다.

노무현은 타국과 싸운 것이 아니라 국민 대다수를 짓밟는 자국 안의 소수 특권세력에 맞서서 혼자서 외롭게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무현을 존경하고 이 시대의 영웅으로, 의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안다. 그들은 반칙을 하지 않고 부당한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면서 싸우려는 사람들이다.

그 싸움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일까? 드골처럼 자기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운 사람이 생전에 존경받고 천수를 누리고 눈을 감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나라를 만드는 첫 걸음은 공익을 추구하는 의인에게 침을 뱉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기꾼을 영웅으로 떠받들어온 언론을 응징하는 것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편집국장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본인은 사임하고, 사장에게도 1931년 만주 침공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언론의 책임을 방기하고 군부의 주구가 되어 국민을 잘못된 길로 끌고 간 책임을 지고 신문을 폐간하자고 건의했다. <아사히신문>도 8월 23일 사설에서 독자에게 사죄했고, 11월 7일에는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고 전쟁으로 몰아간 책임을 지는 뜻에서 사장 이하 편집국 간부가 모두 물러나고 앞으로는 국민을 섬기는 기관으로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힘쓰겠다고 선언했다.

천황 폐하를 떠받들면서 조선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내는 데 앞장섰고 국민이 아니라 독재자를 섬기면서 사세를 넓히는 데만 골몰하면서 그런 처신을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는 우리나라 보수신문과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주인 의식이 있는 존재만이 반성을 할 줄 안다. 언제나 종주국과 독재자라는 상전의 꽁무니에만 매달려서 생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존재에게는 반성은 사치다.

노무현이 긍정의 리트머스지라면 언론권력은 부정의 리트머스지다. 긍정의 리트머스지는 너그러울 수 있다. 정책 때문에 노무현을 비판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정책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의 리트머스지는 너그럽지 않다. 자신의 급진적 노선을 노무현이 따르지 않았다고 참여정부를 까면서 언론권력과 사이좋게 지내는 진보 먹물과 진보 정치꾼은 용납할 수 없다. 언론권력은 자기가 몸담은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생존만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회주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언론권력에 기생하는 먹물과 정치꾼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노무현은 언론권력에 맞선 것이 아니라 기회주의에 맞섰다. 기회주의적 언론은 기회주의적 국민을 양산하고 기회주의적 국민은 기회주의적 대통령을 뽑는다. 기회주의에 맞서는 언론이 있어야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국민이 양산되고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국민이 기회주의에 저항하는 대통령을 뽑는다. 기회주의와 싸우는 언론만이 기회주의와 싸우는 대통령을 지켜낼 수 있다.

드골의 나라는 <콩바> 같은 드골의 우군 노릇을 하는 신문이 있는 나라였다. 노무현의 나라에는 그런 신문이 없었다. 노무현에게는 기회주의에 맞서 끝까지 함께 싸워줄 언론이 없었다. 보수, 진보를 떠나 기회주의에 맞서 싸우는 언론이 없는 한 한국에서 노무현 같은 의인은 절대로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

애달픈 그리움으로 

 

“노무현 대통령님, 대통령님이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 중의 영웅,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에 뽑혔답니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고 싶다고 했던 노 대통령. 생전의 그에게 이같은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던 삶,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삶, 마지막까지 운명과 정면승부를 펼쳐 역사의 승자가 되고 삶을 완성시킨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 시대에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최고의 지도자, 그가 가고 나서야 가치를 깨닫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였다. 지성과 용기, 설득력과 의지, 겸손함과 사려 깊음이라는 덕목을 겸비했다. 유쾌하고 활달한 사람이기도 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고 대의와 역사 앞에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는 최고의 대통령이었지만 그가 가고 나서야 그의 가치를 깨닫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정치인의 소망은 자기의 가치를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 정치인의 소망이죠.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거죠. 지금의 좋은 평가를 받고 싶고 후대의 역사적 평가도 잘 받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두 개의 평가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아주 많이 발생하죠. 그럴 때 결국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면 역사의 평가를 선택하게 됩니다.” -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중

그는 현실에서 왜 그렇게 각박한 평가를 받았나. 진보진영의 취약성과 보수진영의 강고한 결속력에 기인한다. 정치인 노무현은 링컨처럼 역경 속에서 연마한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낮은 사람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지도자의 전형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대통령에의 꿈은 실현되었지만 한국의 풍토는 링컨처럼 현실에서도 평가를 잘 받고 역사에서도 평가를 잘 받기에는 너무 척박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이 한국사회와 정치지형상 우연,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과 시대정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벽은 너무 강고했다. 게다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바로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조급하게 다그쳤다. 금방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했다. 그러니 현실에서의 평가가 좋게 나올 수 없었다.

어느 것 하나 대통령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노 대통령의 재임 시절 나도 신문사의 논설위원이었다. 참여정부 5년의 국정운영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이었다. 어느 것 하나 대통령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보수언론의 발목잡기와 사실 왜곡은 기가 막혔다.

논설위원이란 핫이슈에 대한 논평을 하는 사람들이다. 해묵은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여기에 대한 심층적인 논평은 깊은 공부가 있어야 가능하다. 별 공부가 되지 않은 논설위원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이었다. 그중에서도 단골메뉴는 말실수라고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동네북이었다. 그런데 노대통령이 자신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고작해야 반론권 제기였다. 그러나 반론권 제기는 언론의 망나니짓을 제어할 수단이 되지 못했다.

5년 내내 기득권세력의 공격에 시달리던 그는 그래도 그의 소망대로 무사히 청와대를 걸어 나왔다. 끝까지 그에 대한 신뢰를 지켰던 지지자들도 그가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나왔다는 데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소망했다.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성공한 퇴임 대통령이고 싶다고. 그래서 퇴임 후 평범한 시민으로 사회발전에 기여하려 했다. 그의 작은 비석 속 비문은 말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전직 대통령 전통상을 세워보려던 그는 무장해제 당한 채 집단 린치를 당했다.

역사 속으로, 자연 속으로 돌아가다

얼마 전 출간된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를 보고 나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실패를 진보의 실패로 만들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나를 도와주고 나와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했던 분들을 향해 말했다. 노무현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는 아니라고. 노무현은 이미 정의니 진보니 아름다운 이상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고. 노무현은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졌으니 노무현을 버리라고...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잘못 나의 실패 나의 좌절까지도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고마웠지만 그럴수록 그런 분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서전에 나오는 또 다른 글은 너무 쓰라리다. “그들은 나의 인생만이 아니라 부림사건 변론을 맡았던 이래 내가 했던 모든 것을 모욕하고 저주했다. 민주화운동과 시민운동 대통령직 5년을 포함한 정치 20년 모든 것에 침을 뱉었다.”

그는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었다. 역사 속으로, 그가 사랑했던 고향마을의 자연 속으로 돌아갔다. 그를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미안함을, 그에게 집단린치를 가한 세력들에게도 증오를 품지 않았다. 차라리 산자를 위로하고 떠났다. 고승의 열반송 같은 유언을 남기고 두려움 없이 주어진 운명과 대면했다.

그때 이미 배수진을 치고 있었을까



봉하마을 그의 묘역에는 가신 이에 대한 애달픈 그리움이 가득하다. “엄청난 정치적 수난을 겪으면서도 얄팍한 현실주의 에 영합하지 않고 끝까지 원리 원칙으로 이시대의 중요가치를 일관되게 지키면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고 그 기반을 조성한 대통령”(원불교 좌산 합장)이라는 박석은 노 대통령의 정치역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당신의 희망이 역사의 강물이 되기를’ ‘서민의 애환을 진정으로 아는 대통령’ ‘국민을 진심으로 사랑한 대통령’ ‘열정으로 시대를 앞서간 영웅’ 등. 그를 끝까지 사랑한 마음들이 담겼다.

나도 노 대통령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부터 그를 지지한 사람가운데 한 사람이다. 2년 전 가을, 그땐 생전의 노 대통령에게 꽃바구니를 건넬 수 있었다. 청와대에서 만난 적도 있지만 어쭙잖은 글 몇 번 썼다고 봉하 사저로 오찬 초대를 받은 것은 영광이었다. 봉하마을에 낙향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응하지 않을 때 자신을 위해 끝까지 일관성 있는 변호를 했던 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찬 초대를 했다. 현직을 그만두고 나니 나를 만난 것이다. 그의 사려 깊음이 느껴졌다.

당시 보수언론들이 사저를 두고 봉하 아방궁이니 하면서 입방아를 찧어댔지만 정작 사저는 직전 대통령을 지냈던 분의 사저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했다. 시골인지라 식당에는 파리가 날라다녀 권양숙 여사께서 파리채를 직접 들기도 했다. 정치와 역사 등에 관해 3시간여를 열띤 토론을 하다가 방문객 맞이할 시간이 되어서 악수를 하고 사저를 나설 땐 마음이 아팠다.

당시 대통령은 의기소침했다. 가뜩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라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쑥스러워하고 있는 판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 정권의 모든 일들을 갈아엎으면서, 기록물 유출 운운 하고 있을 때니 허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참여정부는 아무 한 일이 없습니다” 했을 때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위로해도 쓸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때 이미 배수진을 치고 있었을까.

아무도 그의 진실 따윈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퇴임하는 것을 보고 비슷한 시기에 30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는 직장을 그만 둔 것을 후회했다. 그를 위한 변호를 더 이상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 그랬다. 그가 낭떠러지로 몰리고 있을 때 어느 누구도 그가 결백함을 믿는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주지 않았다. 종이신문에서 거의 혼자다시피 노 대통령을 위한 변호를 하고 있다가 내가 은퇴하고 나니 아무도 그의 진실 따윈 거들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모두들 하이에나처럼 덤벼들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시대의 모순을 안고 갈기갈기 찢겨야 하는 그는 그 운명까지도 사랑했다. 생전의 마지막 길, 부엉이바위로 가기 위해 사저 담장을 따라가면서 잡초를 뽑아 던지던 모습은 생과 사를 초월한 성인의 모습이다. 경호원을 곁에 두었다가는 더 큰일이 날 것 같아 정토원에 일부러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떠난 지금, ‘노무현 정신’을 빼고는 정치를 말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그의 뜻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고 있다. 부엉이바위를 보고 가슴 아파하고 ‘대통령의 길’을 따라 걷는다. 추모의 집에서는 생전의 영상물과 유품과 사진 기록물을 볼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정치역정을 담은 영상물은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었다. 애도의 마음이 일렁이는 촛불 앞에 숙연해진다. 사람사는 세상, 깨어있는 시민의 화두들도 계승되고 있다. 친환경농업으로 지은 봉하쌀, 화포천 생태연못 등 어디에나 그의 정신이 들어 있다.

노 대통령 이후 급속히 퇴행한 한국, 하지만 그의 불굴의 의지는 사람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다. 정치인이면서 사랑과 삶, 죽음이 하나임을 다시 깨닫게 하는 노무현 대통령. 그는 정말 우리 시대 영웅 중의 영웅이다. 부처나 예수가 몇 천 년이 가도 사람들의 경배를 받듯 세월이 갈수록 그의 삶은 더 영롱한 빛을 발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 1위에 선정됐습니다.

시사전문지 <시사저널>이 30여개 분야 전문가 1,500명을 대상으로 ‘우리 시대 영웅’을 묻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노무현 대통령이 11.1%(167명)로 1위에 올랐습니다. 지난해 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2위였습니다.

이어 김대중 대통령(9.5%)이 2위에 올랐습니다. 다음으로는 박정희 대통령(9.2%), 김구 상해임시정부 주석(6.4%), 김수환 전 추기경(6.1%)이 꼽혔습니다.

이밖에 안철수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석좌교수(5.7%),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4.9%),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4.9%), 스티븐 잡스 애플 회장(3.5%), 박지성 축구선수(3.4%) 등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1위에도 선정돼

또한, <시사저널>이 여론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정치부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1위로 뽑혔습니다. 2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3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각각 선정됐습니다.

<한국대학신문>과 대학생 포털사이트 캠퍼스라이프가 전국 200여개 대학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0 전국 대학생 의식조사’ 결과에서도 정치인 부문에서 노무현 대통령 대통령이 (18.7%)이 1위를 기록했습니다.

2위에는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14.7%)이 꼽혔습니다. 3위에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10.9%)가 선정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그는 ‘역사의 강물’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을 하루 앞둔 2008년 2월 24일 저녁, 청와대 고별만찬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 않고 평지에서도 굽이치고 좌우 물길을 바꾸어 가면서 흐릅니다. 그것이 세상 이치이지만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후 2008년 4월 20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방명록에 “강물처럼 2008.4.20.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적었습니다.

멀리 돌아갈지라도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뚜벅뚜벅 가다보면 언젠가는 그 뜻을 이루고 말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역사의 순리를 따르며 원칙을 지켜가는 삶의 강물.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에서 실천하여 미래를 만들어가는 강물. 바로 ‘노무현의 강물’일 것입니다.

다음은 김미선 당시 논설위원이 2007년 12월 27일 <국제신문>에 쓴 칼럼입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꼽힌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과 노무현
지배계층 정통성 친일청산 등 어두운 과거사 햇빛에 드러내


우스갯소리로 이명박 당선자 압승의 일등 공신은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한다. 사실 대선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언론은 노 대통령에 대한 '응징'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이번 대선은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호불호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증오가 선거 결과를 갈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권이 BBK 등을 통해 이 후보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공방에 아무리 불을 지펴 보려고 해도 국민들은 끄떡도 안 했다. 노 대통령을 응징할 수만 있다면 막대기를 꽂아 놓아도 뽑을 수 있다는 태도였다.

사람들이 왜 이토록 노무현을 증오하는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가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고, 천문학적인 돈을 해먹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김영삼처럼 나라 살림을 거덜낸 것도 아니다. 대선기간 동안 후보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우리 경제가 왕창 죽어버린 것은 아니다. 거시경제의 지표는 좋아졌다.

양극화와 부동산 실책을 든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실책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공도 많았다. 정치 사회부문의 권위주의는 사라졌고 지난 5년 동안 국가의 기본과 기업체질을 튼튼히 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성장의 잠재력을 많이 축적시켜 놓았다. 과거보다는 대외 신인도가 많이 높아져 수출시장에서도 주식 시장에서도 그 결실이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돈 적게 드는 선거도 이뤘다.

그러니 단순히 실책만으로 정도를 넘어서는 증오를 설명하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노 대통령에 대한 비난 이상의 증오, 살기마저 느껴지는 분노는 그가 우리 역사의 잊고 싶은 그 역린(逆鱗)을 끊임없이 들추면서 우리를 괴롭혀 온 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은 집권 5년 동안 보기 싫은 진실, 이른바 '불편한 진실'을 보도록 끊임없이 들추어 왔다. 그 문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친일청산의 문제이고, 그것에 기생하고 있는 대한민국 지배계층의 정통성의 문제이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의식의 문제이다. 그것이 실타래처럼 얽혀서 이념문제가 되고 남북문제가 되어 우리의 발목을 꼼짝달싹 못하도록 만들어 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쉬쉬하는 침묵의 카르텔이었다.

노무현 집권으로 그 카르텔에 금이 가면서 목하 대한민국의 지배계층의 기원과 본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 지배계층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감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탄핵에서 다시 살아났지만 그때부터 노무현은 고립되었고, 여당조차도 더 이상 아군이 아니었다.

정동영의 실용주의는 바로 그 이탈의 신호탄이었다. 사실 여당이라 해도 아군인 척은 했지만 아군인 적은 없었다. 그들도 엄연한 지배계층이었고 침묵의 카르텔의 일원이었다. 대선에 패배하고 난 뒤 모두가 노무현 탓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태도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정·언·관의 융단 폭격 속에 민심의 이반도 함께 일어났다. 왕조 시대라면 이미 탄핵으로 반정(反正)이 완성된 것이다.

불편한 진실은 지배계층 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노무현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다. 그 어두운 과거, 그 불편한 진실을 가능하면 대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끊임없이 대면시키고 그래서 우리의 심기를 건드려 온 것 그것이 노무현 정부 5년의 일이었다. 그것을 없는 듯이 덮고 그 위에 무엇을 쌓아도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두 번도 아니고 자꾸만 들추어내는 그 불편한 진실은 모두의 울화통을 터지게 했다.

이명박 정부의 출현은 불편한 진실을 이제 그만 덮자는 선택으로 보인다. 정치 경제 사회에서 실용을 앞세워 민생을 살리겠다는 이명박 당선자의 입장은 "이제 좀 조용히 살고 싶다. 입 좀 다물고 돈만 좀 벌게 해 주라"는 다수의 요구와 잘 부합한다.

어두운 진실을 밝은 햇빛 속에 드러내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노무현 정부 5년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퇴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순탄한 대한민국호의 순항을 위해 호흡조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세속적 정치가이면서 성직자나 학자들조차 감히 하지 못한 진실에 대한 열정과 도전으로 "임금님이 발가벗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역사는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