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사랑

“국익과 배치되면 한·미FTA 안해도 된다!”

양현모 2011. 1. 7. 19:56

노 대통령 “국익과 배치되면 한·미FTA 안해도 된다!”
-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한미FTA를 말하다> 출간…지지층 균열에도 왜 추진했나 설명 ‘눈길’

지난 12월 6일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은 절대 없을 것”이라던 그동안의 약속을 깨고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타결했다. 이보다 앞서 11월 23일 일어난 연평도 포격 사건 직후 서둘러 협상을 마무리하려다 ‘한미동맹’을 명분으로 성과는 내주고 불리한 조항은 받은 게 아니냐는 ‘굴욕협상’ 논란이 일었다.

실제 이번 재협상에서 미국이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해온 자동차 관세철폐 기간 연장,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등 대부분 요구가 수용됐다. 타결 직후, 미국 언론은 환호 일색이었다. 블룸버그통신은 ‘오바마의 승리’,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중요한 양보’라는 논평을 내 이번 재협상의 중심축이 어디로 기울었는가 짐작케 했다.

FTA 협상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주문

참여정부 때 통상정책을 책임졌던 김현종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최근 회고록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를 출간했다. 한·미FTA에 대한 보고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저자는 2008년 6월 유엔대사직을 그만둔 뒤 각종 문서와 구술 기록을 꼼꼼히 정리했다.

그는 협상을 둘러싼 과정과 노무현 대통령이 특별히 주문한 사항 등을 다뤘다. 또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 ‘4대 선결조건’의 진실, 의약품 논쟁 등을 500쪽에 이르는 분량에 담았다.

2006년 7월 노 대통령은 한·미FTA 협상을 총괄하고 있던 김 전 본부장을 청와대 관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했다. 그해 2월부터 시작된 한·미FTA 협상에 대한 반대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진보진영의 반대시위는 갈수록 격해졌다. 반면, 한․미FTA를 지지한다는 보수진영은 말뿐이었지, 실제로는 팔짱만 끼고 즐기는 분위기였다. 한미FTA 음모론은 밑도 끝도 없이 확산되고 있었다.

언론까지 가세했다. 진보적이라는 신문들이 앞다투어 반대 특집을 실었다. 방송에서는 'KBS 스페셜'과 MBC 'PD수첩'이 특집방송으로 불을 지폈다. 청와대와 정부가 진화작업에 나섰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음모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대통령 지지도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20%대로 주저앉았다.

게다가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여당은 지방선거 대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한나라당은 '다수의 힘'을 내세워 때마침 현안으로 떠오른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내정자의 인준을 반대했다. 대통령 흔들기가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FTA 타결이 노 대통령에게 가져올 정치적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FTA 외톨이로 남은 한국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지지층의 반대에도 왜 FTA를 추진하고자 했을까?

노 대통령은 한국이 FTA 외톨이가 되는 것을 가장 우려했다. 정치적 부담으로 이 상황을 외면하면 나중에 국가적으로 되돌리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면밀하게 준비해 맞대응하자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2003년 3월 당시까지 한국은 WTO 150개 회원국 중에서 FTA를 체결하지 않은 단 두 나라(몽골 포함)였다.

김 전 본부장은 WTO 법률국에서 일하던 2003년 2월 통상관련 브리핑을 하며, 노 대통령 당선자를 처음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공적자금을 대출받은 한국 기업과 산업이 ‘상계관세’ 분쟁으로 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을 강조했다(상계관세란 수출국이 보조금이나 장려금을 지급하여 수출가격을 부당하게 낮출 경우, 수입국이 그 효과를 없앨 목적으로 정규 관세 외에 부과하는 관세를 말한다).

선진국들은 이 공적자금을 불법보조금으로 간주해 우리나라 수출품목에 상계관세를 물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당시 조선업계와 하이닉스사가 이 상계관세로 분쟁에 휩싸였다. GDP의 70%를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 구속력 있는 이 WTO 분쟁에서 패소하면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2003년 5월 통상교섭조정관을 맡게 된 그는 국민의 정부 때부터 논의되어온 한·일FTA 손익계산서 검토부터 시작했다. 그 결과 부품소재 산업에서 우리 위험이 너무 크다는 평가가 나왔다. 결국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 EU를 상대로 동시다발로 정면협상을 펼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뒤 2010년 기준으로 EU가 84개국, 칠레가 58개국, 서유럽 지역경제기구인 EFTA가 57개국, 멕시코가 48개국, 한국이 44개국(미국·EU 포함)과 FTA를 타결했다.



“국익과 배치되면 안 해도 된다”

김 전 본부장은 한·미FTA 협상에서 노 대통령이 국익에 배치되면 안 해도 좋다고 주문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안한다! 국익에 배치되면 안 해도 된다’는 노 대통령의 접근법이 한·미FTA를 비롯한 다른 FTA의 성공적인 체결을 가능케 했다”고 회고했다.

동시다발적 FTA 전략도 한몫했다. 그는 EU와의 FTA 협상에 놀란 미국이 고자세를 바꿔 한국과의 협상을 서둘렀으며, 이로써 한·미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획득했다고 밝혔다. 이를 기점으로 노 대통령은 특히 국내 쌀 생산농가 보호와 미국 쇠고기 위생조건에 대해 특별한 주문을 언급했다.

2007년 3월 서울 하얏트호텔에서는 한·미FTA 반대 시위대와 경찰이 맞선 가운데 최종 8차 협상을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마침 겹쳐진 중동 순방을 떠나기 전날 협상팀을 불렀다.

“김 본부장, 협상이 되면 물론 좋지만 안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고,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요. 본부장은 철저하게 장사꾼 논리로 협상하고 한․미동맹 관계나 정치적 요소들은 절대로 의식하지 마세요. 모든 정치적인 책임은 내가 질 겁니다.”

밀고 당기는 숨가쁜 협상에서 한국 협상팀은 일관되게 ‘오늘 밤 미국 협상팀이 돌아가도 좋다. 우리는 답답한 게 없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최종 타결 후 그동안 일방적인 비난을 퍼붓던 진보언론들도 협상팀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인정했다.

농업부문에서 미국측의 대폭 양보와 함께 자동차부문에서 수출 물량의 80%를 차지하는 3000cc 이하에 대한 즉시 관세폐지를 받아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는 노 대통령의 무게감 실린 격려가 대한민국 협상단이 마지막 1주일 동안 투혼을 불사를 수 있도록 만든 실질적인 힘이었다고 회고했다.



‘반쪽 짜리’ 왜곡보도

김 전 본부장은 협상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언론의 왜곡보도를 꼽았다. 그는 멕시코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가입 후 주식인 옥수수마저 수입했다는 보도를 대표적인 반쪽 자리 보도로 꼽았다.

멕시코에는 주식 토르티야(또띠야) 원료인 흰 옥수수와 주로 사료로 쓰는 노란 옥수수가 있다. 노란 옥수수 수입이 급증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유는 미국에서 육류에 적용하던 고관세가 철폐되자 멕시코산 육류 수출량이 급증해 사료로 쓰는 노란 옥수수의 수입이 늘어난 것이다. 흰 옥수수의 수입 증가는 미미했다.

또 또티야 값이 NAFTA로 4배나 증가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가격이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NAFTA 때문이 아니라 멕시코 정부가 보조금을 중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멕시코 정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금 징수율은 개발도상국 평균의 18%에 못 미치는 10.5%에 불과하다.

김 전 본부장은 해당 보도의 문제점으로 무엇보다 2005년 한국과 1994년 멕시코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이명박 정부의 한·미FTA 재협상에 대해 “재협상은 없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유감스럽다”면서 “우리 이익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본부장은 끝으로 한·미FTA 협상 중간에 한․EU 협상도 출범시키겠다고 보고드리자, 노 대통령은 “나는 동서화합 대통령이 되고 싶은데 김 본부장 때문에 FTA 대통령이 되겠어”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인사차 봉하마을에 들러 노 대통령께 지난 5년간의 보고서를 쓰고 있다고 하니 “완성되면 꼭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네, 곧 보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좋은 어른이셨다”라고 글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