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명 선생 별세] 선생님은 법조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스승이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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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을 떠나보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생님마저 타계하시니 남아 있는 저희들로서는 황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일 찾아가 뵙겠노라 자제분과 말씀을 나눈 지 불과 몇시간 뒤에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저녁을 잡수시고 미처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니 과연 사람이 바르게 죽는 것이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이 옛 성인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선생님의 떠남은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는 탄식을 자아내게 합니다.
개인적인 인연을 빼고라도 저희들은 결코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70년대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 때 선생님께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민주주의와 관련한 법언과 명구들을 돌출광고로 만들어 응원했습니다. 그것이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물론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이 되었는지 저희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김지하 시인의 옥중수기를 문제삼아 유신독재의 광기가 그의 생명을 위협할 때 선생님은 자청하여 그 사건을 수임함으로써 험난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맡지 않는 가장 힘들고 위험한 사건은 언제나 선생님 몫이었고, 정치권력의 집중적 탄압이 있는 사건의 변론 역시 선생님의 차지였습니다. 이병린 변호사의 빈자리를 이어 선생님은 인권변호사의 맏형이셨습니다. 오원춘 사건,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오송회 사건 등 방방곡곡 선생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80년대에는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의 일을 맡으시면서 크고 작은 인권사건을 몸소 챙기셨습니다. 86년 ‘5·3 인천사태’로 쫓기는 이부영을 숨겨준 것으로 해달라는 저의 부탁 한마디로 인해 선생님을 구속까지 되게 한 일은 저에게 더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불의에 쫓기는 한마리 양을 보호했을 뿐, 결코 범인을 은닉하고 법을 위반했다는 가책을 갖고 있지 않다”고 최후 진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서는 신앙인으로서 고뇌하셨습니다. 저는 30년 넘게 선생님과 산을 같이 다녔습니다. 산이 좋아 산에 간 것도 사실이지만 뒤따라 걸으며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배우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한사람의 법조인이기보다는 삶의 지혜와 오랜 경륜을 지닌 우리 모두의 스승이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탁월한 기지와 해학으로 저희들로 하여금 그 길고 어려웠던 시절을 이겨낼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백범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 발끝이나마 따라가고 싶다며 ‘범하’(凡下)라 자호(自號)하신 것처럼 선생님은 언제나 저 낮은 백성이셨고, 백성의 편에 섰습니다. 이제 그 천의무봉한 선생님의 모습과 그 웃음을 다시는 뵐 수 없다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더없는 슬픔이요 한입니다. 나라가 다시 어려워지고 있는 때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가시니, 우리는 누구한테 이 시대를 헤쳐가는 지혜와 경륜을 얻으리이까. 선생님 부디 영복하시고 그렇게 사랑하셨던 여기 이 땅, 이 나라를 굽어살피사 저희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2011년 1월12일 곡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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