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위(胃)가 몇 개인지 알아요?"
기자에게 되물어왔다.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잘 몰랐다. "글쎄요..."라며 잠시 머뭇거렸다. 이른바 '구제역 대재앙'을 두고,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71)과 마주 앉았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즈음, '왜 구제역이 생기나'라고 물었을 때였다.
조목조목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람보다 훨씬 많은 4개의 위(胃)를 가진 초식성 동물인 소. 그를 둘러싼 공장식 불결한 축산 환경과 항생제 투여 등. 한마디로 "예고된 재앙"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발생 초기 정부가 강력하게 구제역 확산을 막았다면, 결코 이 정도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2000년 3월 구제역이 국내에서 처음 발생했을 때,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구제역 확산을 막아낸 경험이 있다. 특히 최근 한 지방일간지에 '2000년 구제역 사태의 추억'이라는 글을 통해, 현 정부의 허술하고 미숙한 방역체제 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10일 오전 기자와 만난 그는 10년 전 추억을 끄집어냈다. 칠순을 훌쩍 넘긴 그였지만, 2시간 넘는 인터뷰 내내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구제역뿐 아니었다. 작년 말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해서도 그의 날 선 비판은 계속됐다.
옛 아구창 병이 돌면 시골 사람들이 좋아했던 이유
- 2000년 3월의 구제역이 국내에서 첫 발생이 맞나.
"공식적으로는."
- 비공식적으로는 그 이전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구제역이란 것이 매우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 오래전이라면?
"(기자에게) 혹시 올해 몇 년생인가?. (기자가 나이를 대답하자) 어렸을 때 아구창(전라도 지방에서 사람이나 동물의 입을 일컫는 말)병이라고 들어보지 않았나?"
- 들어본 것 같기도.
"그것이 구제역이다. 옛날 시골에서 아구창병이 돌았다고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했었다. 왜냐면 오랜만에 고기 잔치를 벌일 수 있었으니까."
- 감염된 소나 돼지를 살처분해서?
"어차피 오래 살지못하니까... 값싸게 내다 팔거나, 살처분해서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고 그랬지. 구제역 바이러스가 사람에게는 전파가 되지 않기 때문에."
- 2000년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했는지.
"경기도 파주였다. 3월 오후였는데 구제역 의심 신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검사에 들어갔다. 이후 그때 (농림부) 차관보가 직접 현장으로 내려가서 발생 12시간 안에 발생 축산농가 500미터 전방 소, 돼지 살처분과 매몰 등을 완료했다."
그는 구제역 방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생 초기에 즉각적이고, 철저한 통제"라고 말했다. 이유는 구제역이 갖는 무서운 전파력 때문. 그의 말이다.
"구제역이요. 육해공 루트를 통해서 전파력이 무시무시해요. 조금만 신고가 늦거나 통제가 잘 안 되면, 10킬로미터까지 가는 것은 보통이에요. 대만이 우리보다 앞서 구제역이 발생했는데, 초기 대처에 실패하면서 400만두에 달하는 소, 돼지를 살처분 했어요. 어마어마했지요."
김 전 장관은 "2000년 3월 우리가 발생했을 때, 정치권에서 총선이 막 시작할 때였다"면서 "당시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표 등이 농가 위문하러 온다고 하기에, 예를 갖춰서 다 막았었다"고 회고했다.
"새벽 2시 국방장관에 전화를 걸어, 통사정...'구제역이 뭐요?'"
- 그때 새벽에 국방장관에게 전화하셨다고 했는데.
"그랬다. 새벽 2시쯤이었을 것이다."
- 당시 장관은.
"조성태 (국방)장관이었다."
- 무슨 말씀을 나눴나.
"좀전에 이야기했듯이, 구제역이 처음에 통제가 매우 중요하다. 면사무소 직원이나 경찰 등에 맡기게 되면, 아무래도 인정상 철통같이 막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다."
- 군 병력을 빼서?
"(물을 한잔 마시면서) 군 병력을 빼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국방장관에게) 부탁을 했다. 관사로 직접 전화를 해서, 파주로 통하는 24곳에 초소를 세워 (그 지역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소, 돼지와 차량을 통제해달라고..."
- 장관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 황당하다는 목소리였다. 대뜸, '구제역이 뭐요?'라고 묻더라. 그래서 '사람으로 치자면, 에이즈(AIDS)와 같은 병인데, 전파력이 너무 강해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질 수 있다. 잠복 기간이 있어서, 순차적으로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은 당시 국방장관과의 대화 내용 등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당시 국방장관은 '군의 이동은 대통령의 재가가 필요하다'며 처음에 부정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장관의 말은 옳았지만, 상황이 너무 급박했었다"면서 "다음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리고, 사후 재가를 받겠다고 어렵게 설득했다"고 그는 전했다.
- 다음날 대통령에게 곧바로 보고했나.
"아마 해 뜨자마자 청와대로 갔을 것이다. (군 병력 이동에 대해) 솔직히 부담되긴 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께서 '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며 '부처가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 잘했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故) 김대중대통령,'방역은 제2의 국방'이라고 하자 전 부처 협력"
- 그때도 파주를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지 않았나.
"그랬다. 국내 최대 한우농가가 있는 충남 홍성, 충주, 화성, 안성, 마지막이 아마 용인이었을 것이다."
- 초기에 군부대를 동원해 방역해도?
"(담배를 다시 꺼내 들며) 구제역이 그렇다. 그때 군에서 인력뿐 아니라 장비까지 동원돼서, 살처분까지 다 했다. 다섯 번째로 확산했을 때, (구제역) 백신 접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번에도 정부가 백신 처방을 최대한 신중히 했는데.
"그랬을 것이다. 당장 축산농가들의 반발이 거세다. 주사 맞고도 죽으면, 가격이 떨어지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2000년에는) 이런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파격적인 보상과 지원책을 썼다."
당시 정부는 살처분 뿐 아니라 방역조치로 인한 농가 손해까지 보상해줬다. 보상은 당시 시세를 그대로 반영했다. 이뿐 아니다. 축산농가에 대해 사료 값 면제, 농가부채 감면, 생활비 보조와 자녀학자금 면제, 장기저리 자금 융자 등을 정부가 지원을 약속하면서, 농민들의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전 장관의 말이다.
"그때 그런 보상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통령께서 '피해 농민의 보상에 대해 기대 이상으로 파격적으로 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정부 입장에선 당장 재정적으로 부담될 수밖에 없는 일인데···. 지나고 보면, 오히려 그렇게 해서 빨리 진화시킨 것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됐던 것이지."
이번 구제역 파문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일에서야 청와대서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작년 11월 28일 구제역 발생한 지 무려 40여 일 만이다. 이미 100만 마리 넘는 소, 돼지가 매몰된 상태였다. 내놓은 대책 역시 "설 연휴 때 대규모 이동에 대비하라"는 수준이었다.
김 전 장관은 "2000년 민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살처분한 가축 수를 2200여 두 정도에서 막을 수 있었다"면서 "국제수역사무국에서도 구제역을 가장 잘 수습한 나라로 우리나라를 꼽을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후 구제역은 정부 차원에서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매뉴얼로 만들어져 있는 상태"라며 "이번에 과연 매뉴얼대로 움직였는지 의문이 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중에 구제역 음모론까지...올 봄, 제2차 환경 대재앙 올 수도"
- 이번에 살처분하는 소, 돼지 수가 130만 마리(지난 10일 현재)를 넘어섰다. 꼭 이 방법 밖에 없나.
"대만 등에선 미리 예방 백신을 놓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발병하게 되면, 살처분해서 매몰하거나, 소각하는 방법 밖엔 없다. 아니면, 사람들이 먹어 없애는 방법도···."
- 사람이 먹어 없애는 경우도 있나?
"주로, 중국이나 베트남, 몽골 등지에선 아직도 그렇게 하기도 한다. 옛날에 우리 시골에서도 비슷하게 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구제역에 걸렸더라도, 끊이거나 구워먹으면 바이러스가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 이제 살처분 가축을 묻을 만한 장소도 마련하기 어렵다고 한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서 이미 10년 전에 검역기관을 늘리고, 소각시설 등도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일본은 거의 소각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과거 인력, 기구, 장비, 예산이 그대로다."
- 이들 가축들의 살처분에 따른 2차,3차 환경오염 등의 우려도 크다.
"요즘 보면 살아있는 돼지 등을 그대로 매몰시키는 경우가 꽤 있는 모양이다. 정말 걱정이다. 과거 2200두를 묻었을 때도 지하로 침출수가 나왔다."
- 어떻게 했나.
"2차, 3차로 땅에 흙을 다시 덮는 작업을 했다. 만약 지금처럼 살아있는 채로 묻었을 경우,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지하수 등에 가축의 오염물질 등이 흘러갈 수 있다."
- 언제쯤 드러날까.
"(잠시 생각하며) 이미 일부지역에선 지하수에서 핏물이 섞여 나온다고 하지 않나. 아마 올 봄에 굳은 땅이 풀리면서, 2차적인 환경 대재앙이 올 수도 있다."
지난 15일 현재 전국 6개 시·도로 번진 구제역은 여전히 기세가 꺾이질 않고 있다. 이미 살처분해서 땅에 묻은 소, 돼지만도 무려 160만 마리가 넘는다. 뒤늦게 백신 예방 접종을 실시한 정부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한다. 농민들 사이에선 심지어 '음모론'까지 나돌 정도다. 정부의 뒷북 대응에, 무원칙적인 살처분으로 축산농가 뿐 아니라 국내 축산업 자체가 붕괴될 우려까지 나온다.
- 시중에 '음모론'까지 나돈다고 하는데, 혹시 들어보셨나?
"(끄덕이며) 농민들이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생각까지 했겠나. 그런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요즘 미국 쇠고기에 대한 방송 광고도 나오고, 이 와중에 대형마트에서 (미)쇠고기를 헐값에 내놓고···."
- 하여튼, 국내 축산농가 입장에선 이번 구제역을 딛고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처럼 소, 돼지에 대해 살처분이 계속되면 시장에 육류 공급부족 사태가 올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가격안정을 이유로 수입육을 늘릴 것이고···. 농가입장에선 새로 축사 소독부터, 어린 돼지나 송아지를 들여 와 키워서 시장에 내놓기까지 최소 2년은 걸린다. 농가가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칠순을 넘긴 나이의 김 전 장관. 그와의 인터뷰는 어느새 2시간을 훌쩍 넘어섰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간에도 그의 휴대폰은 계속 울려댔다. 구제역을 두고, 언론사의 인터뷰나 토론 참석을 묻는 거였다. 그의 말이다.
"요즘 보면 경제를 살린다는 이유로 너무 물신주의, 물량주의 등에 매몰돼 있어요. 이번 구제역 사건도 그렇고. 이러면 사람들이 너무 다치게 됩니다. 탈락자와 낙오자도 더욱 많아지고, 국민들의 원성이 쌓여만 가면, 정권이나 체제가 오래가질 못해요. 이건 역사적 교훈이죠."
"건강비결, 극우보수 언론들 덕분" |
"실례지만 올해 연세(年歲)가..."
2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김성훈 전 장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아주 세세한 수치나 날짜, 이름 등을 그대로 기억해 냈다. 기자 입장에선 그의 건강 관리도 궁금해졌다.
김 전 장관이 웃으면서 답했다. "1939년생이니까, 나이가 71살하고 5개월"이라며 "올 9월이 돼야 72살이니, 기사로 쓰려면 71(살)이 맞다"고.
- 건강을 위해 따로 무슨 운동이라도 하시는지.
"운동은 무슨...(웃으면서) 시민운동만 계속하고 있다. 날씨가 좀 풀리면, 등산이든 뭐든 해볼까 생각 중이다."
- 말씀을 듣다 보니, 기억력이 좋으신 것 같다.
"이게 다 <조선일보> 덕이다. 아니, 극우보수 언론 덕분이다."
- 언론 때문이라고요?
"이 정부 들어와서 극우신문들은 대놓고 나를 무슨 좌파, 빨갱이 취급하지 않았나. 이들 덕분에 항상 머리가 긴장상태에 있었다."
김 전 장관은 현재 <조선일보>와 명예훼손에 따른 소송을 진행 중에 있다. <조선일보> 쪽에서 작년 5월에 촛불집회 2년 기획기사를 내면서, 김 전 장관의 발언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2010년 5월 11일치,"올해 햄버거 먹으며 미국 여행?<조선> 작문실력은 명불허전")
지난 2000년 구제역 파동 때는 또 다른 보수언론과 일전을 치렀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당시 구제역이 확산할 기미를 보이자, 한 신문은 구제역에 걸린 소를 먹으면 사람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으며, 정부가 이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고 폭로한 것.
주무장관이었던 김 전 장관은 곧장 "구제역에 걸린 돼지나 소는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으며, 해당 가축을 사람이 섭취하더라도 사람은 해가 없다"면서 "해당 기사는 오보(誤報)"라며 강하게 반박했었다. 그의 말이다.
"그때 해당 언론사 데스크와 기자를 통해 온갖 협박성 말을 많이 들었지요. 이어 그쪽에서 농림부에 기존 출입기자 이외, 추가로 베테랑급 기자 2명 투입하더니, 내 주변을 샅샅이 뒤집고 다니더군요. 정말 무소불위의 언론이라는 것이 실감 나더라구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