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는 사람을 보는 기쁨보다 보내는 사람에 대한 슬픔에 더 익숙할 나이가 된 것 같습니다. 몇 년 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겨움을 선사했던 분들이 연이어 세상을 떴습니다. 노무현 김대중 법정 김수환 리영희 이돈명….
오늘 또 거기에 박완서 선생을 더해야 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제가 만나거나 또 생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은 그냥 편안하게 느껴지는 분입니다. 마치 이웃집 아주머니마냥, 여성들에게는 친정어머니처럼 아무 부담 없이 다가오는 분이 박완서 선생입니다.
지적 수준은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적 연륜을 무시할 수 없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는 그런 것까지 다 내려놓고 사신 분입니다. 그런 탈권위적이고 소박한 삶을 그는 글 속에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갖는 연민, 불의한 세력에 맞서는 용기, 소시민적 삶에서 건져내는 따스한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사롭게 만듭니다.
제가 그를 따스한 사람으로 처음 느끼게 된 것은 그분의 이름에 기인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한자로 '완(婉)자 '서(緖)'자입니다. '완'자는 아리땁고 순하고 따스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서'자는 '실마리', '나머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름 속에 그 사람의 과거와 현존 나아가 미래까지 담겨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박완서 선생의 함자(銜字)를 떠올릴 때마다 참으로 그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분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또 순한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 따스했습니다. 그분을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동일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아니 직접 만남이 아니라 글을 통한 간접 만남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그분에 대한 감정이 이런 것입니다.
그늘진 곳에 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작가
박완서 선생은 이 세상의 주류보다는 비주류 인생을 글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나머지'는 주변부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나머지 인생들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들에게 인정을 주사(注射)하고, 사랑을 투영하며, 순수를 묘사해서 감동적인 문학 작품을 생산해 냈습니다. 따라서 그가 발표하는 작품은 거의 히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글 중 아직도 마음에 생생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필이 하나 있습니다.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막막한 미래에 버거워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읽게 된 그의 에세이입니다. 그 에세이는 그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 듯, 책의 제목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그것입니다. 일등만 인정해 주는 사회에 이 글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의 섬세한 관찰의 결과이겠지요? 버스를 타고 출타를 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차가 오랫동안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마라톤 경기로 교통이 통제되었던 것입니다. 작가는 1등으로 달리는 마라톤 선두 그룹을 직접 보기 위해서 버스를 내렸습니다. 교통경찰이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현장에 가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구경꾼이라고는 할 일 없는 어른 몇 명과 조무래기 아이들뿐이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선두 그룹이 그 장소를 통과한 지는 한참 지났고 지금 들어오는 선수들은 마라톤의 꼴찌 그룹이었습니다. 작가는 이를 악물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꼴찌들의 모습에서 참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선두 그룹은 작은 숫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위치에서 삶을 영위해가고 있습니다. 갈채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박완서 선생은 이 사회가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인 사회, 즉 조화로운 사회가 되기를 꿈꾸었던 것 같습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와 별세 직전까지 젊은이 못지 않은 건필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의지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존재가 사고를 규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분의 삶 자체가 주류가 아닌 '나머지'를 선호한 삶이었음을 볼 때 당연한 귀결이라 여겨집니다. 그는 늘상 작가는 빛이 드는 곳보다 그늘진 곳에 서 있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지성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줘
6·25전쟁은 비단 박 선생에게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민족 전체에 끼친 폐해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전쟁의 상흔은 너무나 컸습니다. 가까운 혈족인 숙부와 큰 오빠를 잃는 아픔은 그가 감내하기 힘든 체험이었습니다. 그 전쟁의 아픔과 처절함을 고발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의 소설 곳곳에 스며 있는 전쟁의 경험이 반인륜적 고통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음을 벌 때, 동족상잔은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과거지사로 못 박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1남 4녀를 둔 어머니였습니다. 딸 넷 가운데 아들 하나는 어머니에게는 단순한 아들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도 잘 자라주어 서울대 의대를 나와 인턴으로 의술 수업을 받는 기대 이상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원 당직 날 연탄가스 사고로 먼 길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석 달 전 남편을 잃은 지어미로서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한 일이라 그 황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박완서 선생은 마지막 생을 이웃을 위한 봉사로 채웠습니다. 말과 글에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의 노구를 섬김의 현장으로 이끈 것입니다. 유니세프(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한 그는 글로 몸으로 저개발국 아동들의 복지를 위해서 애썼습니다.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지성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이 세상을 뜬 것입니다.
그의 구수한 이야기를 이젠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따스함 속에서 피어나는 강렬함도 추억으로만 간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우리를 가만히 앉아 있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약자를 위해서,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이 땅의 소외 계층을 위해서 움직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일 것입니다. 따스한 마음으로, 순한 모습으로….
박완서 선생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오마이뉴스이명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