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는 노무현이다”
- 2월 25일 노 대통령 귀향 3주년 맞은 봉하마을
3년 전 2월 25일 월요일.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고, “귀찮고 하기 싫었던” 분장을 하며, 9시 뉴스와 조간신문 기사 하나하나에 책임감을 느끼고, 가는 곳, 하는 말마다, 심지어는 마음을 읽는 투시경이라도 달은 냥 눈빛과 표정까지 이러쿵저러쿵 쪼아댔던 언론, 비가 오지 않으면 안 와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와서 걱정이던 날들이 가고 마침내 퇴임식을 맞이한 노무현 대통령. 그가 자서전 <운명이다>에 적은 그날의 소회를 다시 읽어봅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각본에 따라 주어진 배역을 하는 연기자가 된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가 따라다닌다. 국민의 눈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대통령은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갖추고 참모들이 만들어 놓은 행사에 가야 한다. 가끔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청와대를 나온다는 것은, 이 모든 것들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깊은 안도감과 퇴임 후 삶에 대한 설렘을 가슴에 품고 청와대의 마지막 밤을 편안하게 보냈다.”
봉하 귀향, ‘대통령 노무현’에서 ‘시민 노무현’으로
취임식을 시작으로 대통령으로서 보낸 날이 1,825일. 퇴임식이 있었던 2008년 2월 25일은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그의 신념 위에 올려놓았던 ‘대통령으로서의 사명’을 내려놓는 날이었습니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담담히 역사와 국민에게 맡기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면서 떠나왔던 고향 봉하마을에, ‘깨어있는 시민’으로 다시 돌아가는 날이었습니다. 32년만의 귀향이었습니다.
노 대통령의 귀향 결심은 퇴임 약 2년 전인 2006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외교일정으로 나이지리아를 방문했을 때였는데, 빽빽한 일정으로 여지없이 바쁜 노 대통령을 지켜보던 권양숙 여사가 정치지도자이자 남편으로서 그의 퇴임 이후, 삶의 최선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꺼낸 제안이었습니다. 노 대통령 역시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통합이라는 오랜 숙원이자 숙제가 남아있었고, 한국 현대사에서는 유래 없던 ‘퇴임 대통령의 시민으로서의 삶’에 첫 모범사례가 되어보자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민으로서, 은퇴한 전직 대통령으로서 꼭 성공하고 싶다”는….
‘자연과 사람의 어울림’, 화포천 복원과 친환경농사
퇴임 뒤 노 대통령은 화포천 습지 복원, 봉화산 가꾸기, 마을 환경 개선, 친환경 생태농업 등에 매진했습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화포천 청소입니다. 사저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이었는데, “봄을 그냥 보내면 1년을 그냥 보내는 것 같다”며 머뭇거림 없이 바로 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당시 화포천은 인근 공단에서 방류한 폐수와 생활 오수, 축산 폐수, 불법 투기한 대형 폐기물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과 참모진,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수거한 쓰레기만도 1톤 화물차로 100대가 넘었습니다. 더불어 ‘화포천 지킴이’를 만들어 불법 어로와 밀렵, 쓰레기 투기를 지속적으로 막아내는 노력도 병행했습니다. 화포천 청소는 자연스럽게 습지와 마을환경 개선에 대한 관심과 행동으로 확대되어 봉하마을은 물론 인근지역 환경개선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2008년 시작된 친환경농사는 이제 봉하마을의 대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첫해 농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농지의 60% 이상이 부재지주 소유인데다 농업용수가 좋지 않았고, 성공확률이 높지 않은 친환경쌀을 재배한다는 것에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하필 그해는 조류 인플루엔자까지 유행을 해, 행여나 '친환경 오리쌀'의 주역인 오리들이 감염될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때 노 대통령은 “내가 다 책임진다”는 말로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망설임을 가라앉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소비자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노무현 캐릭터’도 제안했습니다. 친환경농사의 성공사례를 찾아 연구를 거듭했고, 전문가들을 초빙해 노하우도 전수받았습니다.
첫해는 8만㎡(2만4천여 평)에 농사를 지어 50톤의 수확량을 올렸고, 이듬해는 424톤(79만천㎡, 24만여 평), 지난해는 약 550톤(99만㎡, 30만평)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과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땀 흘려 심고 가꾼 장군차는 마침내 올해부터 맛좋은 상품으로 소비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노 대통령 귀향 3년, 한해 평균 ‘133만 명’ 봉하 찾아
귀향 뒤 노 대통령의 생활은 농군이자 자연인, 시민 활동가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봉하 들판과 화포천, 봉화산 곳곳마다 그가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를 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던 봉하는 김해 으뜸의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어떤 기자가 우연히 내가 쉼터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을 찍어 내보냈다. 나가지 말아야 할 사진이 나간 경우였다. 손녀와 아이스크림 먹는 사진은 조금 쑥스러운 장면이었다. 농사짓고, 숲을 가꾸고, 개울을 청소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다닌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다만 대통령 지낸 사람이 그렇게 하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다.” <운명이다> 중에서
이렇게 시작된 방문행렬은 노 대통령이 서거하고 1년 7개월여가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해시에 따르면 노 대통령이 귀향한 2008년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봉하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이 4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퇴임 첫해가 84만 명, 이듬해는 추모인파가 더해져 236만 명, 지난해는 80만 명이 노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올해 <노무현재단>과 <봉하재단>은 노 대통령과 그를 기억하고 만나려고 봉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묘역과 생가, 추모의 집, 추모공원 등 봉하마을과 추모 건축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봉하마을 마스터플랜’도 준비가 한창입니다.
친환경 봉하쌀은 양적 팽창에 만족하지 않고, 품위분석기와 성분분석기를 도입해 ‘완전미’에 도전하는 등 보다 경쟁력 높은 상품으로 거듭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봉하는 노무현이다’
노 대통령이 자전거를 달리던 마을길, 비지땀을 흘리던 봉하 들판과 장군차밭, 방문객들과 함께 마을 전경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던 사자바위, 정토원, 갈대와 억새, 그리고 겨울철새가 어울려 날아가는 화포천, 쉼터, 추모의집, 친환경쌀 방앗간, 그리고 묘역. 노무현, 그가 있는 곳마다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가득합니다. 머잖아 사저가 개방되고 나면 그의 손때가 묻은 서재의 풍경 속에도 사람들의 숨결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이제 봉하는 노무현입니다.
3년 전 2월 25일. 노 대통령이 봉하마을 귀향보고 자리에서 했던 인사말로 그와 봉하의 지난 3년, 그리고 앞으로 3년, 30년을 꿈꿔봅니다.
“여러분들 멀리서 오셨죠? 오늘 저녁은 어디서 드십니까? 잠은 어디서 주무시렵니까? 걱정 마십시오. 우리집이 있습니다. 근데, 말해놓고 나니 큰일입니다. 함께 우리집에 가야 하는데, 다 못 들어간데요. 그러니 이렇게 합시다. 이 (봉하마을) 마당도 우리집이고, 진영도 우리집이고, 김해시장 가보셨어요? 김해도 우리집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지요? 다음에 따로따로 모시겠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여러분들 제 집으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정말 가슴에 아프지만, 기회가 나서 오시면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돌아가시고요, 다음에 또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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