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노동자 김진숙의 빚과 꿈
세상 속으로 2011/01/20 02:06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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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이 춥습니다. 마음이 무거우니 몸이 더 시립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 님(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에게는 미안합니다. 그 분을 생각하면 마냥 춥다고 할 수 없는데요. 2주 전(1월 6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지브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그녀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싸움에 돌입하면서 조합원들에게 남긴 글 한 토막입니다.
"스물한 살에 입사한 이후 한진과 참 질긴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 하고, 부산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가고 쉰 두 살이 됐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생각했는데 가장 큰 고비가 남았네요.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멸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짤려 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조합원들 운명이 뻔한데 앉아서 당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붙어야 하는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한진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서 우리 조합원들 지킬 겁니다."
칼바람이 매섭게 부는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은 2003년 10월17일 정리해고에 맞서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주익 전 노조 지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그 자리입니다. 김진숙(1986년 해고)은 지금 김주익 열사가 129일 동안 머물렀던 그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상을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이곳 1평 남짓한 타워크레인 운전석은 생수, 전기담요, 이불이 전부라고 합니다.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크레인을 사수하는 한진중공업 조합원 동지들이 도르래로 올려주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합니다. 낮에는 집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어 격려를 하고, 저녁 집회 때는 전화로 연설을 합니다. 해가 지면 매일같이 조합원들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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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익 열사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조합원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남긴 '빚'은 무게를 잴 수 없습니다. 한진중공업 악덕자본이 휘두르는 정리해고 칼날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에게 들이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말부터 2년째 노조는 파업으로 저항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작년 초 800명, 하청노동자를 포함하면 2000명이 정리해고 됐습니다. 또 1년도 되지 않아 구조조정을 멈추기로 한 노사합의를 깨고 다시 400명을 짜르기 시작했습니다. 희망퇴직자와 정년퇴직자 110명을 빼면 290명이 길거리로 쫒겨날 운명입니다. 일터를 빼앗기면 노동자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1월 12일) 한진중공업은 기어이 이들 생산직 노동자 290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2월 14일 모두 사망 처리한다고 부고장을 발송했습니다.
74년 대물림하며 한진중공업 조선소 노동자들이 청춘을 불사른 곳, 그 대가로 경영진들은 2억원이 넘는 연봉(총 8억원)과 200억원이 넘는 주식을 배당받으면서 '경영이 어렵다'고 다시 400명의 노동자들을 짜르고 있습니다. 필리핀 수빅조선소와 에너지산업에는 수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입하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이윤을 창출해 온 흑자기업의 존재방식이라면, 노동과 자본의 불편한 공생은 이렇게 잔혹함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나이 쉰둘에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이 되어 35미터 크레인에 오른 이유를 우리는 압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또 모르지 않습니다.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무겁고 깊고 아픈 상처를 극복하여 승리와 부활의 탯줄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차고 비장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한진중공업 동료들, 경남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묻혔으나 차마 잠들지 못하고 있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열사와 명퇴 압박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둔 박범수, 손규열 동료노동자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일 겁니다. 오랜 세월 김진숙은 '부채감'에 가슴 저미는 아픔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들'에게 진 빚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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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나이에 5000명의 현장 노동자 가운데 유일한 조선소 여성 용접공. 1986년 2월 한진중공업 노조대의원에 선출되면서 국가폭력기구를 등에 업은 자본권력의 회유와 협박, 구타와 감금, 그리고 부당해고로 이어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우리 시대 진짜노동자. 한진중공업을 상대로 복직투쟁 등 싸워온 기간만도 25년.
아픔을 겪고 견디어 온 사람만이 우리 노동자들의 설움을 아는 것일까요. 같은 처지에서 긴 세월을 싸워온 사람만이 기약 없는 투쟁의 길에 나온 노동자들의 절망과 분노와 회한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랬습니다. 김진숙은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듬직한 맏언니, 큰누나였습니다. 지치고 흔들리는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열정을 주고, 진짜노동자의 길이 뭔지를, 어떻게 하면 그 길을 갈 수 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그녀는 연대를 실천하고 희망의 가치를 생산하는 아름다운 노동전사입니다.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 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맨날 우리만 죽고 천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아무리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억장 무너지는 분노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이 억울함을 언젠가는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동지 여러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소금꽃 노동자 김진숙 님의 고공농성을 바라보며 7년 전 그녀가 부산역 광장에서 읽었던 김주익 열사 추모사가 겹쳐집니다. 그날 우리에게 울먹이며 호소했던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강고한 연대'입니다. 지금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7년이 지난 오늘 김진숙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이 땅의 1600만 노동자와 가족들에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본의 연대와 맞서 함께 싸우자'고 다시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왜 35미터 크레인에 올라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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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제 빚을 갚아야 할 차례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이 세상 철문에 갇혀 몸부림치는 이 땅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눈이 왜 붉은 핏발이 서려 있는지를 안다면, 지금의 세상은 바꾸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모순과 억압과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의 컨베이어입니다. 그것을 바꾸고, 견고한 노동착취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면 노동자는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노동자가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인간답게 살 수도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바라는 세상,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며 생산의 주인이 되는 공장, 가슴 뛰는 희망공장으로 우리는 함께 뚜벅뚜벅 가야 합니다.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는 한진중공업, GM대우차, 대우자동차판매, 쌍용자동차, KCC 구미공장, 대전 롯데백화점, 발레오공조, 동산병원, 콜트콜텍, 재능교육, 국민체육진흥공단...노동자들의 고단한 싸움. 쉬운 투쟁이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서로 맞잡은 손을 놓거나 주저앉는 순간에는 무참히 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자본가와 영혼이 있는 노동자, 이 둘은 분명히 차이가 있겠지요. 깨지더라도 그 자리, 노동자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언제나 있다는 것. 떠나지도 않고, 떠날 수도 없다는 것. 자본은 순식간에 바닥날 수도 있지만 자본을 지배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는 영원하다는 것. 그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뼈 속 깊이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힘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74년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지켜온 노동자들에게, 용기 있는 결단으로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는 김진숙 해고노동자에게 뜨거운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리해고를 철회시켜 승리의 깃발을 들고 영도바다 앞에서 뜨거운 함성을 내지를 수 있기를. 다시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해고의 두려움 속에서 1년이고, 2년이고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함께 하겠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서러운 총알받이, 이 땅 질경이로 피어난 소금꽃나무들의 단결과 연대로 세상의 침묵을 깨뜨리는 그날까지. 이곳저곳 자본에 팔려 몸뚱이 하나로 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밭갈이 하는 보습이 유난히 빛나게 될 그날까지. /굴렁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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