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차 아산공장 엔진부 현대차 마크 찍힌 작업표준서. 작년 7월 대법 판결 이후 현대차 마크가 안 찍힌 걸로 작업표준서가 바뀌었다. 이 사진은 바뀌기 전 자료. |
다음날인 2월 9일 오전 11시 30분엔 의장부 공정기술과의 G대리 요청으로, 214호실에 의장부 총무들이 다시 모였다. G대리는 사양식별표 양식을 참조하여 작성하고, 초도 작성시 회사 창립일 기준으로 하여 날짜를 확인하고 디비젼을 변경하라고 했다.
B총무는 이런 지시에 따라 2월 14일날 오후 1시에 G대리와 미팅을 하고 USB에 사양식별표 원본을 받아와 업체명으로 수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5일엔 J과장이 의장부 총무 회의를 열고, 보안공정 관리대장을 다시 언급했다. B총무는 J과장에게 작업 표준서와 사양식별표 작성 후에 G대리에게 보낸 후 이상이 없으면 통보하라고 했다. 그리고 21일 사양식별표와 작업표준서 결제를 하고 완료 보고를 했다. 이어 USB로 복사한 후 G대리에게 제출하고 A4카피본도 제출한 후 J과장에게 23일 퇴근 후에 게시하자고 했다. 23일 G 대리의 요청으로 사양식별표 중 틀린 것 2건을 수정 제출했으며, 이날 18시 15분께 사양식별표와 작업표준서를 교체했다.
이렇게 현대차 아산공장 A하청업체의 B 총무가 자신의 수첩에 기록한 현대차 불법파견 증거인멸 과정은 회의를 통해 치밀하게 진행 됐다.
금속노조가 공개한 B총무의 수첩은 현대자동차가 사내하청업체들의 원청사용주임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또 2010년 7월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후 그 동안 존재해 왔던 불법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공모하고 지시한 행위들이 자세히 적혀있다.
수첩의 내용대로라면 현대차는 원청과 하청이 조직적이고 집단적으로 불법파견을 은폐하기 위해 증거인멸 행위들을 벌였다.
오지환 현대차아산사내하청지회 교선부장은 "작년 7월 대법 판결 이후 작업표준서는 현대차 마크가 안 찍힌 걸로 바뀌었다"며 "엔진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는 06년부터 불파 문제가 이슈가 되자 작업표준서를 계속 바꿔왔다"고 설명했다.
▲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 작업표준서. 현대차 마크는 없어지고 오른쪽 위에 하청업체 이름이 적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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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 아산공장 A하청업체의 B 총무가 자신의 수첩에 기록한 현대차 불법파견 증거인멸 과정은 회의를 통해 치밀하게 진행 됐다. |
현대차 불법파견 고의성 인정하는 증거
이런 행위들은 현대차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과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대응하기 위해 불법파견의 증거가 될 수 있는 부분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증거인멸 시도가 담긴 B총무의 수첩은 불법파견인 줄 몰랐다고 발뺌할 수 있는 현대차의 논리에도 고의성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김태욱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창원지법에서 GM대우에 불법파견으로 판결하고 형사처벌을 한 것은 회사가 파견인지 아닌지 몰라서 고의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지만 서류변경 행위가 오히려 고의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고 설명했다.
현대·기아차 그룹 모두 지난해부터 작업표준서 교체 증언 많아
현대·기아차는 이미 지난해 대법원 불법파견 판결 이후, 고용노동부 사내하도급 실태조사에 맞춰 불법파견의 일부 증거를 지우는 등 은폐조작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참세상이 현대·기아차 각 공장 정규직·사내하청 노조 관계자 등을 통해 입수한 자료와 증언에도 현대·기아차는 작업표준서나 사양서 등에 나타난 원청 마크나 원청 관리자 결제 사인 란을 없애고 하청업체 마크나 하청업체 관리자 결제 사인으로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노동부 실태조사 대상이었던 기아차 소하리 공장은 라인에서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분리 됐다는 식으로 일부 공정에 비닐 칸막이를 설치하는 등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2010년 10월 말께 당시 기아차 소하리 노조의 한 대의원에 따르면 “불법파견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회사가 이미 많이 바꾸기 시작했다. 원래 원청인 기아차 마크가 찍혀 있는 작업표준서나 시설 등 원청이 관리하던 것을 다 협력업체 이름으로 바꿨다. 심지어 건물에도 관리자 확인란의 정.부가 협력업체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 기아차 3개 공장 중 실태조사 대상이 된 광명 소하리 공장은 지난해 9월 추석 전에 PDI공정(완성차 최종 출고 직전 검사라인)에 파란색 라인을 그리고 투명 칸막이를 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분리돼 일하는 것처럼 꾸몄다. 사진 왼쪽은 간이 칸막이 공사전, 오른 쪽이 공사 후. |
불법파견의 증거를 지우는 작업은 현대차 울산공장이나 전주공장에서도 B총무의 수첩에 적힌 대로 진행됐다. 지난 해 10월 29일 현대차 울산공장 사내하청 지회 한 관계자도 “작업 표준서 마크는 그대로지만 기본적으로 확인란을 업체 명의로 했다. 이전에는 정규직 과장이나 조반장이 사인을 했는데 요즘은 업체가 사인을 한다. 또 각 사내하청 업체에서 각종서류를 소각하고 파쇄기에 돌리기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고 실태를 전했다.
현대차 전주공장 사내하청지회 관계자도 “각자 자기 작업 공정을 위해 머리 위에 붙어 있는 각 공정 작업 지시서나 사양서, 표준작업서에 기존엔 현대차 마크가 있었으나 하청업체 이름으로 바뀌었다. 관리자 확인란의 정부도 원래 정규직 반장이나 조장, 과장이었던 것이 아예 없어지거나 하청업체 관리자 이름으로 바뀐 상황”이라고 밝힌 바 있다.
▲ 기아차 작업표준서. 오른쪽 표준서의 아랫 부분에 기아차 마크가 있다. 변경된 표준서(왼쪽)는 업체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
▲ 왼쪽은 현대차 전주공장의 변경전 작업지시서, 오른쪽은 변경후 작업사양서. 지난해 9월 초 하단의 칸 모양이 바뀌었다. |
불법파견 관련 각종 서류 폐기도
불법파겨 증거인멸 행위는 작업표준서와 사양식별표 바꿔치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5월 9일 대전지방노동청 천안지청에서 A하청업체에게 온 출석요구서를 업체 사장이 협력지원팀의 H대리에게 보고했고, 6월 21일 H대리는 업체에 찾아와 안전협의회 회의록, 시말서, 안전보건 합동점검 추진 계획서, 안전보건 관리업무 계획서, 안전화, 귀마개, 피복 신청서 및 지급대장, 안전, 보건 계약서, 일일 안전점검 순찰표, DR TRIM 발생현황, 월 이종, 미장착 관리표, 토크 관리대장, 키퍼일지, 업무 분담표(총무, 소장, 반장, 조장) 등 불법파견 관련 서류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B총무는 7월 28일에 지방노동위 관련 각종 폐기서류를 확인하고 정리했다고 수첩에 적었다. 금속노조는 H대리와 B총무가 벌인 일을 “원청인 현대차가 아니라 하청업체가 각종 인사, 노무, 안전보건 등을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고, 불법파견을 은폐하기 위한 행위를 지시하고, 이에 따라 원청의 사용자성이 인정되는 자료들을 폐기한 것”이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고용노동부의 여러 조사요구에 대해 사내하청 업체가 현대차 협력지원팀에게 일일이 보고와 확인을 통해 지시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B총무의 수첩에 따르면 지난 8월 31일 지방노동위 조사관이 B총무에게 2010년, 11년 채용공고가 있으면 팩스로 보내달라고 하자, B총무는 H대리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H대리가 보내주라고 하자 보내줬다. 9월 7일엔 지노위 조사관이 2010년 사업소득세 납부서류를 요청하자, H대리가 2011년 5월 종합소득세 영수증을 보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고용노동부, 사내하도급 실태조사 신뢰성 바닥으로
B총무의 수첩은 지난 해 고용노동부가 대법 판결이후 진행한 사내하도급 실태조사 결과의 신뢰성에 타격을 줄 전망이다. 이 실태조사에 따라 마련된 사대하도급 노동자 보호가 포함된 비정규직 종합대책 역시 사업주에 편향 됐다는 것을 반증하게 돼 노동계의 반발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1월 24일 사내하도급 실태조사 결과 발표에서 기아차 소하리 공장. GM 대우, 르노 삼성자동차 3개 사업장 모두 불법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당시 노동부는 “점검을 완료한 GM대우,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르노삼성자동자는 원·하청근로자의 작업내용이 구분되고, 작업공정이 분리되어 혼재작업을 하지 않는 등 적법 도급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또 대법원이 불법으로 본 가장 중요한 이유인 업무지시나 근태관리에 누가 영향을 미치는 가를 두고 노동부는 “실제 노무지휘권 행사는 직접 사내하도급업체에서 행사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대법원은 사업주가 위장도급의 전형으로 내세운 현장대리인(사내하청 업체)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내렸다. 대법의 판단은 도급사 현장대리인이 업무지시를 전달했어도 실질적인 원청 사용주의 역할을 누가 했는가를 봤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B총무의 수첩은 실질적인 원청 사용주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애초 노동부나 검찰이 불법이 오간 행위를 적발할 의지만 있었다면 B총무의 수첩이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았다는 지적도 있다. 노동계에선 검찰이 현대자동차 협력 지원팀 관계자나 하청업체 사장 이메일만 압수수색 했어도 광범위한 증거조작 행위 자료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해 왔다. 이미 2005년 불법파견 수사 때에도 이메일이나 사내인트라 넷으로 광범위하게 주고받은 증거자료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합동취재팀=윤지연, 심형호, 김용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