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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천국 노동지옥'에 희망 퍼뜨리는 소금꽃나무

양현모 2011. 7. 13. 19:22

'자본천국 노동지옥'에 희망 퍼뜨리는 소금꽃나무
[신인물열뎐⑦]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당 (dangk) 기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 정태권
김진숙

'희망버스'는 끝내 '소금꽃나무'를 만나지 못했다. 9일 노동법상의 '제3자'인 시민 7천 명이 전국발(發) 부산 영도행(行)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리해고 철회'를 내걸고 35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에서 185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51)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제3자'들이 9~10일 1박2일에 걸쳐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찾았지만, '소금꽃나무'를 포위한 경찰버스 차벽과 무자비한 강제진압에 막혀 '김 지도님'(트위터에서 통용되는 '김진숙 폐인'들이 붙인 호칭)이 크레인 위에서 환한 웃음으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진 못했다. 김진숙과 시민들 사이에 또 다른 '명박산성'을 쌓아 격리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미디어오늘>이 네이버 뉴스캐스트의 50개 언론사 대상으로 뉴스 편집을 분석한 결과(10일 오후 12시30분 현재)에 따르면, 한진중공업 사태를 뉴스캐스트에 배치한 언론사는 8곳에 불과했다. 이들을 제외한 KBS, SBS, YTN 등 텔레비전 방송과 <조선><중앙><동아><매일경제> 등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들은 뉴스캐스트에 '희망버스' 뉴스를 배치하지 않았다. 경찰이 부산에 쌓은 '명박산성' 보다 더 무서운 야만과 폭력은 언론의 의도적 무관심과 무시의 차폐벽이다.

 

81년 여성 최초로 대한조선공사 용접공

 

서울에서 반값 등록금 관련 집회를 열어도 2~3천 명을 모으기 힘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에 7천여 명이 휴일에 제 돈(참가비 3만 원) 내고 자발적으로 모였다는 것은 '세계 민중사에서 처음 보는 획기적인 일'(권영길 의원)이다. '미국의 양심'으로 통하는 노엄 촘스키 교수도 10일 "희망버스 1만명 시민들의 노동자들을 위한 자발적 연대는 '못 믿을 경이로운 이야기'"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국내를 넘어 세계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한진중 사태를 주목하고 있다. 미국 CNN 방송과 프랑스 <르몽드>, 중동의 알자지라 방송 등 해외 언론에서도 이번 사태를 보도했다. 국내의 제도 언론이 애써 무시해도 한진중 정리해고 문제는 이제 한진중이라는 개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선 것이다. 바로 그 '못 믿을 경이로운 이야기'의 중심에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 해고 노동자 출신 김진숙 지도위원이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출신의 김진숙은 1981년 미혼 여성으로는 최초로 대한조선공사(이하 '조공') 용접공이 되었다. 그러나 6년차 숙련공이던 86년 7월 어용노조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해고되었다.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반관반민 형태였던 '조공'은 조선 경기 침체로 인한 경영악화로 89년 5월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으로 회사명이 바뀌었다. 그래서 일부에선 그를 한진중과 무관한 '제3자'나 '외부세력'으로 치부한다.

 

실제로 그는 20년 노동운동을 하는 동안 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한 번씩, 두 번 구속되었는데 모두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였다. 그는 자신의 오랜 현장 경험을 토대로 지난 2007년 5월에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속된 경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소금꽃나무>는 지난 2007년에 독서문화 향상과 양서출판 활성화를 위한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학 분야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이하 출처를 따로 밝히지 않은 인용문은 모두 <소금꽃나무>에서 인용한 것이다).

 

1986년 해고 이후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로 2번 구속

 

1986년에 해고된 이후 그는 "어딜 가나 3자"였다. 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 때 '조공'에서도 마침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웠다. 민주노조는 이듬해 해고자 복직문제로 파업을 할 때, 해고자들을 불러 의견을 청취했다. 김진숙은 파업현장에서 해고자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하면서 "이번 기회에 확실히 단결해서 기필코 해고자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다가 "조합원들을 선동했다고 3자 개입으로 1990년에 구속되었"다.

 

"3자, 그게 참 우습더군요. 해고된 당사자가 복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도 3자라더군요."

 

그는 부산노동자연합 의장으로 활동할 때인 1993년 9월 당시 부산 동래봉생병원 노동조합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합법적으로 노조를 설립해 "노조 사무실 마련, 노조 전임자 인정, 임금 인상 등을 안건으로 병원 측과 교섭을 하는데 정의화 원장(현 한나라당 의원-편집자주)은 교섭 석상에 한 번도 안 나오고 계속 관리들을 통해 조합원 탈퇴공작을 일삼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거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병원 측이 노조 파업현장을 급습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은 그가 현장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은 어린 간호사들을 관리자들의 무지막지한 폭력으로부터 막아낸 것뿐이었다. 조합원 10명이 전치 10일에서 5주까지 진단서를 첨부해 폭력을 행사한 병원 측 관리자 21명을 고발했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노조 측은 13명이 사법처리돼 3명이 구속되었다. 김진숙도 2년 뒤인 1995년 10월 '3자개입' 혐의로 구속되었다.

 

1981년 '조공'의 배관공으로 입사해 28년 어용노조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입사 동기' 박창수 한진중 노조위원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었다. 1990년 7월 한진중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93% 찬성이라는 신화적인 지지를 얻고 당선"된 박창수는 대기업 노동조합연대회의에 참석했다가 '제3자 개입금지' 위반혐의로 1991년 2월초 구속되어 서울구치소 수감 중에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김진숙이 25년째 지금도 '한진중 해고자' 신분인 이유

 

그 뒤로도 노조위원장을 죽음으로 몰아간 한진중의 노조 탄압은 계속되었다. 지난 2003년에는 회사 측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동결하고 65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자 노조는 파업으로 맞섰다. 회사는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김주익 지회장을 비롯한 노조간부 20명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와 함께 임금과 주택 등에 가압류를 신청하고 이들을 고소고발했다.

 

김주익은 마지막 투쟁수단으로 85호 크레인 위에 올라가 회사 측에 교섭을 촉구하는 고공농성을 벌였다. 회사는 농성 129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해 10월 17일 그는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이다"는 유서를 남기고 크레인에서 목을 맸다. 2주 뒤에는 한진중 노동자 곽재규가 85호 크레인 근처의 4도크에서 투신했다.

 

2년을 끌던 한진중 정리해고는 두 노동자의 죽음이 있고 나서야 마무리됐다. 그들의 희생으로 그동안 '조공' 시절을 포함한 한진중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노동자들이 모두 복직되었다. 1986년 김진숙과 함께 어용노조의 비리를 폭로했다가 해고된 지 20년 된 박영제, 이정식도 2006년 1월 1일 복직되었다. 단 한 사람, 김진숙은 제외되었다.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한다는 이유였다. 한진중 노조로부터 소정의 생계 보조비를 받아온 그는 늘 수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25년째 지금도 '한진중 해고자' 신분인 이유이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는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사측은 늘 노조와의 합의를 밥 먹듯이 어겼다. 2007년 3월 한진중 노사는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인한 고용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공장 관련 특별단체교섭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의 '국내 물량 확보 및 조합원 고용보장' 조항은 "회사는 현 수준의 적정인력을 유지하며 경영상의 이유로 국내 공장의 축소 및 폐쇄 등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특히 해외공장 운영으로 인해 국내공장 조합원의 고용불안이 발생치 않도록 한다"고 돼 있었다.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2009년 사측은 합의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일방적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노조는 다시 파업으로 맞섰다. 노사는 이듬해 2월 '2009년 노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합의'에 다시 서명했다. 합의서에는 "회사는 2009년 12월 18일부 인위적인 구조조정(일방적 정리해고)과 관련하여 2010년 2월 26일부로 중단한다"고 돼 있었다.

 

그러나 일방적 정리해고를 중단하기로 한 이 합의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사측은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2011년 1월 다시 400명의 추가 정리해고를 단행하려 했다. '일방적 해고는 살인'임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낀 '25년차 한진중 해고 노동자' 김진숙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김진숙은 1월 2일 8년 만에 처음으로 방에 보일러를 켰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목욕탕도 다녀왔다. 그는 2003년 이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았다. 85호 크레인에서 129일 동안 혼자 추위와 외로움에 떨다가 죽어간 김주익 때문이었다. 그는 사측이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기 전날인 1월 6일 새벽 3시 칼바람을 맞으며, 김주익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의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올라갔다. 이렇게 유서 같은 편지를 남기고.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중략)…평범치 못한 삶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만 이번 결단을 앞두고 가장 많이 번민했습니다. 85호 크레인의 의미를 알기에 지난 1년. 앉아도 바늘방석이었고 누워도 가시이불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앉아야 했던 불면의 밤들. 이렇게 조합원들 잘려나가는 거 눈뜨고 볼 수만은 없는 거 아닙니까."

 

"스물여섯에 해고되고, 대공분실 세 번 끌려갔다 오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수배생활 5년하고, 부산 시내 경찰서 다 다녀보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 쉰두 살"의 머리 희끗한 이 여성 해고 노동자는 35m 높이의 크레인에 둥지를 튼 지 6개월을 하루 넘긴 7일, 한낮엔 무더위, 한밤엔 먹구름에 갇힌 그곳에서 멀리 남아공 더반에서 날아온 '평창의 낭보'와 함께 생일을 맞이했다.

 

'죽은 김광석'과 '산 아이유', '죽은 전태일'과 '산 김진숙'

 

"52년 동안 생일을 제대로 챙겨본 건 징역살 때와 오늘. 의외의 곳에 있을 때 오히려 거하게 축하받은 거 같습니다 이번엔 IOC까지 나서서 아흨~ 그림의 떡, 꽃, 케잌, 그리고 멘션으로 생일축하 보내주신 분들, 특히 날라리(김진숙을 응원하는 문화패-편집자주)들 고맙습니다^^빗소리 들으며 잘 놀겠습니다."(7일, 김진숙 트위터)

 

그가 '또 한 마리의 파리목숨'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른 것은 "19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박창수와 김주익을 향해 "자본이 주인인 나라에서, 자본이 천국인 나라에서, 어쩌자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을 감히 품었단 말입니까? 어쩌자고 그렇게 착하고, 어쩌자고 그렇게 우직했단 말입니까?"라고 울부짖으면서도 그 또한 같은 길을 가면서 '노동의 연대'와 '단결이라는 방탄조끼'를 입고 꼭 승리하자고 외친다.

 

"세기를 넘어, 지역을 넘어, 업종을 넘어, 자자손손 대물림하는 자본의 연대는 이렇게 강고한데, 우린 얼마나 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의 연대는 얼마나 강고합니까?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외면한 채 우린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가 크레인에 둥지를 틀자 사측은 전원을 차단하고 휴대폰 배터리 반입까지 막았지만, 태양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는 오히려 "35m 크레인 위에서 군고구마 먹어 본 사람 있냐"면서 "공기 좋고, 전망 직이고, 봄이 오면 텃밭을 가꿔서 가을에 걷어 먹을 생각"이라고 '여유'를 부리면서 태양광 배터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조나단 시걸'처럼 멀리 필리핀 수빅조선소의 살인적인 노동실태까지 트위터로 재잘대며 국제연대를 호소한다.

 

10년을 준비해온 '평창의 꿈'은 '2전3기' 만에 이뤄졌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한진중 노동자의 꿈은 노조위원장 2명이 죽어서도 아직 미완성이다.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된 건 평창만이 아니다. 지난 6월 선보인 SKT '생각대로T'의 새로운 광고캠페인 '현실을 넘다'의 첫 번째 편에선 '죽은 김광석'과 '산 아이유'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내게는 '죽은 전태일'과 '산 김진숙'이 함께 노래 부르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노동자의 땀과 눈물로 쓴 '날 것' 그대로의 '20년 노동일기'인 <소금꽃나무>는 노동자도 인간임을 일깨운 <전태일 평전>을 떠올리게 한다. '노동자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우리시대의 논리를 현실에서 실천해온 그는 지금 35m 크레인 위에서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본 천국 노동 지옥'인 대한민국에 '희망의 꽃씨'를 퍼뜨리는 '여자 전태일'이다. 아니,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고 믿는 중졸 노동자 김진숙은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었으면' 소원했던 전태일을 이미 넘어섰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