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뒤바꾼 사건
- 1988년 4월 19일 직접 쓴 43년 삶의 역정과 철학
‘내가 걸어온 길’ 노무현
▲ (왼쪽)1954년 초등학교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가난했던 학창시절엔 잘 곳이 없어 학교에서 잠을 자야만 했던 적도 있다.
뒷간 갈 때 생각과 나올 때 생각이 다르듯이
우리 또래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의 어린 시절도 무척이나 가난했다. 우린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아야 했다. 한 학급에서 나 혼자만 필통을 사지 못해 누님에게서 물려받은 헌 필통을 새 필통과 바꾸자고 옆의 친구들을 꾀다가 급우들로부터 망신당했던 일, 크레용을 사지 못해 미술 시간마다 꿀밤을 맞으며 꾸중을 듣던 일, 사친회비를 못 내어 한 달에 한두 번은 꼬박 꼬박 집으로 쫓겨 오던 일, 고등학교 3년간 한 푼이라도 싼 곳을 찾아 하숙, 자취, 가정교사, 회사숙직실 등을 전전하던 일 등 지내놓고 보면 젊은 시절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되지만, 당시는 왜 그렇게도 서럽고 괴로웠던지 눈물로 입을 악다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잘 곳이 없어 초겨울 어느 날 학교 교실에서 이틀을 잤던 일이다. 밤새껏 이를 악물고 얼마나 떨었던지 다음날 이빨이 아파 온종일 밥을 한 숟갈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고생과 설움 속에서 나는 이담에 커서 출세를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설움도 갚고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돈 걱정 따윈 안 해도 되고 알아주는 사람 많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 데로 생각하면 정말 살맛이 나는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사실 변호사란 직업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없으나 매일반이었다. 돈 없이는 변호사를 이용할 방법이 없다보니 변호사는 돈 있는 사람 편에 서서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결과가 왕왕 생기게 마련이다.
이 같은 일상적인 변호사란 직업에 대해 양심의 갈등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우선 가까운 부모형제들을 돌보아야 하고, 장차 노후를 위해 부동산 따위도 좀 사두어야 하고, 시골에 농장이나 별장 하나쯤 장만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 양심 같은 건 거추장스런 것으로 여겨졌다.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심사였으니 뒷간 갈 때 생각 다르고 나올 때 생각 다르다는 경우가 바로 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무슨무슨 수석 합격자가 나와서 장래 법관이 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거나 의사가 되어 헐벗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자기 포부를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혼자 쓴웃음을 짓곤 했다. 지금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노릇을 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과거에 그런 포부를 말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해보면, 나 혼자의 쓴웃음은 일종의 양심적 죄책감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자기직업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사회에 올바르게 이바지 하는 것이라는 반 어거지적 자기 합리화를 방패삼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 변호사 초기, 노 대통령은 헐벗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헌신하겠다는 소신과, 개인적 안위, 가족부양 등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도 했지만 1981년 ‘부림사건’을 계기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내 양심의 눈시울을 적시던 민주청년 동지들
그런데 1981년 소위 부림사건(1981년 7월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청년 20여 명이 「역사란 무엇인가」「전환시대의 논리」 등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했다 하여, 최고 57일간 대공분실에서 불법 감금되어 고문에 의해 좌경용공으로 조작된 사건)의 재판을 맡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려 57일간이나 가족들에게 아무 연락도 못하고 짐승처럼 지내야 했던 청년들, 매를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몸을 내보이면서도 얼마나 고문에 시달렸던지 변호사마저도 정보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눈치를 살피던 파리한 몰골의 청년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죽었던 가슴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던 청년들, 어느 한 사람 예외 없이 학교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들,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길래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수십일 동안 밀실(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그런 방)에 가두어 놓고 개돼지처럼 차고, 때리고, 물고문 하면서 만들어 놓은 조서의 내용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내 눈에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하물며 조서란 조서는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오로지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 청년들에게 순수하게 불타던 이상이 죄었고, 순수한 이상을 가진 만큼 남과 달리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조국의 장래를 누구보다 걱정하면서 부정과 불의에 용감히 항거한 것이 죄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명하신(?) 재판장은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하고 3년, 5년, 7년씩 마구잡이로 감옥에 처넣었다. 같은 사건으로 따로 재판을 받은 한 사람은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그 후 항소심에서는 어처구니없게 유죄로 둔갑해버렸고, 그 일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던 양심적인 판사는 진주로 쫓겨 갔다가 끝내는 법복을 벗고 말았다.
그 사건의 재판기간 동안 나는 그 청년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 성적도 우수하여 남보다 나은 자리가 보장된 사람들이 왜 부모님들의 간절한 소망마저 내팽개치고 자기 앞날을 스스로 망치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들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차츰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고 자신과 가족, 부모형제끼리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이웃의 고통이나 권력의 부정부패, 불의 따윈 모른 체하는 것이 상팔자라고 체념하고 살던 나의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일처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눈멀었던 나의 눈에 화려한 사회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을 똑똑하게 보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아픔이 가슴에 전달되어 오면서 어린 시절 나의 고통과 울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부림사건 이후 변호사 노무현은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 나섰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맡게 되었다.
애국 청년들과 함께 군사독재타도 투쟁에 나서기로 결심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겨우 입에 풀칠하기가 고작이고 자식의 대학 진학은 커녕, 쓰러져 가는 자기 집 한 채의 꿈도 가져볼 수 없는 이 땅의 무수한 헐벗은 사람들, 어디를 가도 사람대접 해주는 곳 없는 인생 핫바지들.
그러나 그들에 비하면 대낮에도 골프장에 나가 한 판에 2백만 원짜리 내기골프를 즐기면서 그 짓도 힘든 일이라고 사우나탕에 가서 몸 풀고, 저녁에는 수백만 원이 휴지처럼 뿌려지는 술집에서 여자들을 옆에 끼고 희희낙락하며 농탕을 쳐도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하루에 이자수입만 5천만 원이 넘는다고 거들먹거리며 으스대는 사람들, 어떤 사람은 단돈 2천 원을 훔쳤다고 쇠고랑을 차는데 어떤 사람은 수백억을 꿀꺽하고도 외국이나 들락거리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 이것이 어찌 사람 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이처럼 세상살이 공평치 못한 것은 사람이 잘나고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빨아먹기 위해 한통속이 되어 법과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나 혼자 하는 무료변론 몇 건 따위는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각이 들어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었다.
무료변론도 좋지만, 가난한 사람 동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모순을 조장하고 있는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정치가 민주화 되어야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사람대접 받으며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독재정권을 물리치는 일에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무료변론 정도야 돈 좀 덜 벌고 시간 좀 더 내면 해결되는 일이었지만 독재정권에 맞서서 민중의 편에 선다는 것은 언제 어디로 끌려가 병신이 될지, 언제 무슨 죄목을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찰지 온갖 위험과 일신상의 불행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그만 농장이나 별장 하나쯤은 소유하고, 내 자식 놈만은 외국에 유학을 보내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우리 부부의 한을 풀어 보겠다는 개인적인 희망조차도 모조리 포기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82년부터 나는 하루하루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도 나는 하나하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요정이나 싸롱 등 고급 술집에서 발을 끊고 그렇게 좋아하던 요트 타기도 그만두었다. 그때까지 술 먹고 놀고 친척 도와주느라고 모아놓은 재산이 없었으므로 악착같이 아끼면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사건의 수임과정이나 처리과정에서도 최대한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조그만 약점이 될 만한 일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준비는 하면서도 막상 무슨 일에 나서지는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는데 1983년 감옥에 갔던 부림사건의 청년들이 출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나에게도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자는 제의가 오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들에게 사무실을 내주기도 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걸핏하면 경찰관들이 사무실 앞을 지키고 내 뒷조사를 헤집고 다니는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도 망설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 출소한 청년 한 사람을 내가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마음이 곱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처리했다.
그 청년은 고문으로 건강이 매우 나빠 궂은 날이면 신경통으로 결근하기 일쑤였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월급 받고 편하게 사는 것이 괴로운지 몹시 고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의 망설임은 하나씩 어떤 확신과 신념으로 바뀌어 갔다.
▲ 취미삼아 요트를 타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늘 어려운 길을 선택했던 노 대통령.
부산 민주세력의 집약체인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고
당시 나는 그의 고통을 볼 때마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자식 놈의 얼굴이 그 청년의 얼굴에 겹쳐졌다. 이 녀석이 장차, 대학에 갔을 때 나는 무엇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이 청년이 가고 있는 길을 똑같이 가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못 본 체하고 어떻게든 높은 자리에 앉아 돈이나 벌며 편히 살라고 할 것인가? 양심이니 정의니 말은 하기 쉽지만 그것을 차마 내 사랑하는 자식에게까지 이 청년과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깊은 고민 끝에 결국 현재의 우리 애비 에미들이 앞장서서 장차 우리 자식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대신하여 자식들에게 이 불의가 판치는 세상,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통과 절망을 그대로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 봄부터 부산에서는 종교인, 지식인들이 모여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어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임에 쾌히 참여했다.
그 이후 전두환 정권의 최대악법 중의 하나였던 학원안정법 결사반대투쟁, 2·12총선, 직선제 개헌을 위한 개헌현판식운동, 부천서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의 규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궐기, 4·13호헌 반대투쟁, 우리국민의 민주승리인 6월항쟁을 치르기까지 강연, 집회, 시위, 상담, 변론 등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투쟁했다.
그동안 ‘노동법률상담소’를 만들어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기도 하면서 1986년 9월 이후부터는 변호사로서 일상 업무인 사건수임을 일체 중단하고 오로지 민주화 운동에만 전념했다.
▲ (왼쪽)1987년 5월 20일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 발족식에서. (오른쪽) 같은 해 2월 7일에는 故 박종철군 추모대회 때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치렀다.
마침내 구속되고 변호사 업무조차 정지명령을 받아
그러다가 1987년 2월 7일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 때에는 경찰에 연행되어 3일 동안 구속 영장이 3번이나 청구되기도 했고, 1987년 6월 11일에는 6·10대회건으로 다시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더니, 마침내 1987년 9월에는 대우조선 이석규 노동열사의 장례식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20여 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그러다가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까지 받게 되었다. 원래 1986년부터 사건수임을 중단하고 있었으므로 업무정지라 해도 먹고사는 문제와는 별 관계없는 일이었으나 학생사건이나 노동사건의 변론에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은 6월 민주항쟁, 노태우의 6·29 항복은 분명 우리 국민이 받아낸 민주투쟁의 승리였다. 그 항쟁기간 ‘국민운동본부’는 시민항쟁의 정신적 구심점이었고 나는 그 중심에서 야전사령관(87년 6월 항쟁당시 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었음) 노릇을 했다.
아내 몰래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 유인물을 만들고 확성기를 사주고 밤을 세워가며 청년들과 작전회의를 하고 밤 2~3시 모두들 수배된 몸이라 잠자리를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몰라 하는 청년들과 악수를 하고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그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에 뜨거운 동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고 있는 박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6월 민주항쟁 중에서도 6월 18일 밤, 부산
6월 18일, 그날은 수십만의 애국 부산시민이 한데 엉켜 ‘독재타도’를 합창하며 밤늦게까지 온 거리를 메웠던 6월항쟁 중 가장 당당한 날이었다. 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부산시민이 만든 위대한 6월 18일.
그날의 부산시민은 정말 내 가슴에서 눈물을 쏟아놓게 했다. 그날은 ‘국민운동본부’도 재야운동권도 청년·학생들도 모두 부산시민들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 녹아버렸다. 그날 나는 시민들의 대열 속에 파묻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청년들이 부르는 출정가 ‘어머니’를 힘차게 따라 불렀다.
나는 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는가
이제 내가 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게 되었는가를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애석하게도 우리 국민들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분열 때문에, 아니 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전두환, 노태우의 부정선거 때문에 군사독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돈과 관권, 그리고 보도기관을 장악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을 저지른 노태우가 6·29선언은 마치 자신의 민주신념인 양 떠벌리면서 민주시대를 자기가 몰고 온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요, 아직 우리사회가 민주화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어려움과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 한다. 지금은 그야말로 민주로 위장된 군사독재가 반민주의 극을 달리는 가짜 민주화의 시대이다.
노태우는 과연 누구인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그리고 이번 국회의원 후보자로 공천을 받은 민정당 사람들은 민주 인사들이 양심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천 명이 감옥에 가고 매 맞아 죽을 때 무슨 일들을 하던 사람들인가?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너무 쉽게 노태우를 믿고 있다. 이에 설상가상으로 야당은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총선을 앞두고 통합에 실패함으로서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민족적 범죄자들에게 국회의석의 3분의 2를 넘겨주는 비극이 올지도 모른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노태우와 민정당은 이번 총선에서 절대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5년 후 대통령 간선제로 개헌을 하여 영구집권을 음모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재야는 재야대로 분열되어 힘이 없다. 다시 재야를 재건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야 하겠으나 당분간은 그 전열정비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노태우와 민정당에 조국의 운명을 그대로 맡겨둘 수 없는 일은 아닌가? 이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마침 통일민주당에서 함께 싸워보자는 제의가 있었다. 어차피 나는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검찰은 나를 죄인으로 기소했고 법원은 유죄판결을 내렸다. 소위 6·29선언 이전에 있었던 집회와 시위에 주동자였다는 것이 나의 유죄의 내용이었다. 6월중에 구속되었던 사람들은 다 풀어놓고 나서 한참 후에 새삼 나만을 기소한 것은 보복적 조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과연 내가 죄인인가? 나는 국민 앞에 나서서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심판받고 싶었다. 6월의 거리를 가득 메우고 함께 싸웠던 부산시민들의 심판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나의 민주화 투쟁이 국회의원 한 자리를 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시인도 부인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지난 연말연시에도 달력이나 명함은커녕 카드 한 장 누구에게 보낸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단 몇 사람의 명단도 지역구를 나누어 관리하고 있는 일도 없었다. 설사 국회의원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평소 선거자금을 모으고 사조직을 관리하거나 달력을 만들어 보내는 따위의 속임수로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대신에 민주주의를 자기 한 몸 기꺼이 내던지는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기만하지 않는 정직하고 공평하고 정의를 목숨처럼 존중하는 당당한 국민의 대변자로서 부끄럼 없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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