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사건과 변호사 노무현의 구속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
1981년 부산지역 최대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은 변호사 노무현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변호사 노무현은 돈 많이 벌고 흔히 ‘잘 나가던’ 조세전문 변호사에서 인권·노동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사회 현실에 눈을 뜨면서 독재권력의 폭정과 사회 불의에 맞서 부산지역 시국사건과 노동사건 변론을 도맡는다.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공해문제연구소와 노동법률상담소가 차려졌고, 변호사 노무현은 법정 아닌 거리의 시위현장을 누빈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활동에 이어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을 맞는다. 87년 6·29선언 직후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온 가운데 8월 거제에서는 대우조선 노동자가 노사분규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무현 변호사는 대우조선 노동자들로부터 사체 부검 입회 및 진상조사 요청을 받고 거제로 달려간다. 노동자와 유족들을 도와 사태수습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노 변호사에게 당국은 ‘장례식 방해’와 ‘3자개입’ 혐의를 씌워 구속한다. 그리고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23일간의 옥살이를 한다.
사료편찬위원회에서는 당시 노 대통령이 대학노트에 자필로 쓴 22장 분량의 <故 이석규 장례관계 사건일지>와 15장 분량의 <영장에 기재된 소위 범죄 사실에 대한 나의 항변>을 입수해 공개한다.
노 대통령은 <사건일지>에서 사태수습과 진상조사 활동에 대한 일자별 행적을 기록하면서“이석규 사망이 경찰이 저지른 고의적 살상”이라고 규탄한다. <사건일지> 말미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료 뒤에 간략한 사건 개요를 붙였다.
변호사 노무현
내가 거제 있는 동안 우리가 한 일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부터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내가 부산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계속 정부나 언론의 공격을 받아왔다.
마침내 이상수 변호사는 먼저 구속되었고, 나는 9월 2일 23시경 장례식 방해,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구속되었고 지금 해운대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앉아있다.
나는 이후에도 이 문제에 관하여 수사 과정에서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반역적 독재집단의 잔재들로 이루어진 정부의 탄압이 있고, 그 장단에 춤추는 검찰과 법원이 있을 뿐 진실을 밝히려는 정의를 세우려는 검찰도 법원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던 선량한 우리 대중들마저 언론의 거짓말 보도 아래 판단이 흐려져 있는 듯하여 진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이하의 기록은 기억이 허용하는 한 내 양심을 건 진실임을 밝힌다.
87년 8월 22일 저녁(정확한 시간은 기억 안남). 이호철[당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사무국 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대우조선 농성근로자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병원에 옮기던 중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부산에서도 누군가가 가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누가, 왜, 무엇하러 가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전혀 대화가 없었으나 지금껏 있어왔던 사체 탈취와 화장, 사건은폐, 보도통제 등의 선례로 보아 되도록 빨리 진상을 조사해 둘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저녁에 내 차로 거제로 가볼 양으로 옷을 갈아입고 민협 사무실로 나왔다. 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밤중에 가봤자 제대로 할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다음날 아침에 가자고 약속을 하였다.
이석규 사망은 공권력의 국민 적대 만행
8월 23일 아침 8시. 나와 이호철, 홍OO, 조OO(익명 처리)가 함께 연안여객 부두에서 배를 탔다. 도중에 배의 고장으로 거제 장승포항에 도착한 것은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장승포항에서 우리는 대우조선 해고근로자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그들로부터 사건 경위를 들으려 하였으나 그들도 사망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아니라 하므로 우리들은 일단 대우병원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우병원에 들어간 것이 오전 10시경이었다.
대우병원에 도착해 보니 밤을 새운 듯한 노동자 400~500명이 여기저기 웅성웅성 앉아 있기도 하였고 소수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비는 삼엄하였으나 전체적으로는 체계가 없고 어지러운 분위기였다. 그곳에서는 전날 저녁에 노조 집행부 간부 일부와 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주민들이 공동으로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두고 있었다.
우선 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안내로 분향을 마친 다음, 대강의 얘기를 듣고는 그들의 소개로 노조 집행부와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산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마산본부)의 김영식 신부와 같이 온 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노조위원장 양동생은 멀리까지 와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장례 등은 자기들이 맡아서 할 수밖에 없으나 여러 가지로 잘 모르는 점이 많을 것 같으니 조언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였다.
노조 집행부는 너무 분주하여 누구를 붙잡고 사건 진상을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김영식 신부나 나나 장례에 관하여 뭘 아는 것도 없고, 막막한 심정이 되어 걱정만 하고 있는데, 양권식 신부가 왔다. 그때가 11시경이나 되었을까? 그는 16일경부터 그곳에 와서 노조 집행부와 대화를 하고 있었고 협상에도 깊숙이 개입하여 있었다.
그리고 이제 장례위원회 구성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어제 저녁에 그 대강을 노조 집행부에게 조언해 주었다고 했다. 이어서 현지 민주인사, 부산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 마산운동본부 사람들과 양권식 신부와 함께 대책회의 비슷한 회합을 가졌다.
양 신부가 지금까지의 분규 경과, 사망 경과, 그리고 장례위원회 구성에 관한 복안 등을 죽 설명하는 입장이 되다보니 자연히 회의를 그가 주관하는 셈이었다. 그는 장의를 전국노동자 장으로 하고 장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전국 노동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으로 모시고 장례위원은 300명 정도로 하되 거제 현지 노동자와 유지 100여명을 모시고 나머지는 재야인사들을 모시기로 하고, 저명인사 몇 분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실제로 업무를 추진하는 집행위원장은 노조위원장이 되고 그 아래 여러 개의 실무부서를 두되 각 실무부서에 운동본부 실무자와 현지 인사들이 한두 사람씩 들어가서 협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논리는 정연하고 인상은 성실해 보였다. 그 뒤에 우리는 아무 준비도 없던 상황에서 매우 정비된 제안을 받은 셈이니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우리 쪽도 여러 사람이 모였으니 이곳에서 계속 할 일이 있다면 전체를 통제하고 노조나 기타 대외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과 의사를 대변하는 지도부 같은 것이 있어야 할 사정이고, 그 일에는 양 신부가 노조와는 이미 얼굴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사정에도 밝고 더욱이 연세대 이한열 군 장례에 시종 관여했던 경험도 있다하니 딱 적임인데, 그는 굳이 그날 저녁 안으로 서울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라 하여 우리는 김영식 신부를 대표자로 내정하였다.
점심은 굶은 채 오후에는 양 신부, 김 신부 등과 노조 집행부 함께 연석회의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국노동자 장’이 결정되었고, 장례위원회의 구성도 양 신부의 안대로 결정이 되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 집행부 누군가의 입에서 가족이 광주 망월동 묘지를 원한다는 말이 나왔다. 그 문제는 최종적으로는 가족을 만나 협의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그 논의 얼마 후 대우조선 해고 노동자를 장례위원회 실무부서에 편입하는 문제도 논란이 되는 것을 보고 나는 해고 노동자 쪽을 설득하여 실무부서에 들어가지 않도록 결정을 지어주었다. 이 논의과정에서 노조위원장 양동생이 해고 노동자들은 의식화 교육을 받은 불순분자라는 취지의 말을 하여 김 신부와 운동본부 사람들은 마음이 좀 상했다. 그 직후 김 신부가 볼일이 있다며 가버린 것이 그 때문이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다음날 천주교단 자체에 무슨 행사가 있다는 말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다. 어떻든 김 신부는 25일경 돌아왔으나 매사에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 87년 8월 23일 옥포대우병원 앞마당에서 ‘이석규 민주노동열사 순국진상보고 대회사’를 하고 있는 노무현 변호사
오후에는 양 신부의 권유로 장승포 성당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좀 쉬었다. 그날 14시경 연다던 ‘사망경위보고대회’는 준비가 늦어 뒤로 밀리다가 17시경에 열렸다. 처음 무슨 말을 한 마디 해달라고 하였으나 여기저기 나서는 것이 마치 얼굴 팔러 다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거절했다. 그런데 17시가 가까워오자 다시 성당으로 연락이 와서 할 수 없이 나왔더니 대회사를 해달라 하여 대회사를 하였다.
대회사에서 나는 “이 사망은 공권력이 국민을 적으로 보는 전투적 행위에서 빚어진 살육인 동시에 그동안 노사 분쟁에서 사용자 측의 서류탈취 등 불법이나 구사대의 폭력에 대하여는 수수방관 하던 공권력이 노동자의 폭력에 대하여는 구속으로 나서는 편파적 개입의 연장선상에서 저질러진 노동자에 대한 적대행위이므로 우리 전 국민과 노동자가 함께 이 같은 만행을 규탄하여야 하고, 그것만이 이 같은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막는 길”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그 집회가 끝난 후 노조 집행부가 폐회를 선언하자 흥분한 노동자들은 갑자기 ‘나가자’ 라는 함성과 함께 가두시위로 나섰고 집행부는 뒤늦게야 이를 만류하는 방송을 하였으나 항의만 빗발칠 뿐 전혀 효과가 없었고, 조금 후에는 경찰이 병원 앞마당까지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분위기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 얼마 전부터 검찰이 부검을 하러 오겠다고 양 신부와 의논이 되었으나 분위기가 악화되어 부검은 다음날로 미뤘다.
집회가 열리기 얼마 전 서울 노동단체의 대표들이 왔었고, 집회시간쯤 서울운동본부(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서울본부)의 김도현 씨와 이상수 변호사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김봉조 의원(민주당)은 오전부터 왔던 것 같다. 이미 김 신부가 나가버림으로써 사실상 우리쪽 지도부가 부재한 상태에서 서울쪽 사람들이 대거 내려오고 보니 부산, 경남, 거제 사람들로만 엉성하게 만들어 놓았던 협의체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고, 이후 25일 저녁까지 운동본부 임원들은 임원들대로 청년운동가들은 그들대로 적당히 이미 하고 있는 일에 끼어들어 자연스럽게 일이 돌아갔다. 그러나 체계가 없으니 일이 무질서 하였던 것은 사실이고 일부는 일을 돕는다기보다 진행상황을 기록 정리하여 각 소속단체로 전달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날 저녁 이 변호사와 나는 노조 집행부와 함께 고 이석규 씨의 가족을 만나보았다. 양 신부도 동행하였던 것으로 기억하나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 어머니와 형, 그리고 백부, 외삼촌 등 여럿이었는데, 그들은 보상에 제일 깊은 관심을 보였다.
처음 그들은 부모 먼저 죽은 자식을 고향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 화장을 하겠다고 했는데, 노동자들이 대우조선 안에 묻겠다고 하므로 이곳은 너무 머니 그러면 옛날에 최루탄으로 죽은 한열이가 묻힌 곳에 묻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노조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하였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이미 노조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노조가 보상 문제에 관하여는 전혀 아무 대책도 생각함이 없이 장례를 서두르는 데 반하여 가족들은 보상을 받기 전에는 시신을 한 발짝도 옮길 수 없다고 했고 오히려 노조 간부가 보상은 여기 변호사들이 잘해 줄 거라고 말했고, 가족들도 그렇다면 노조에서 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이어서 누군가가 광주 5·18묘역에는 자리가 없을 지도 모르고, 시영이라서 광주시의 허가를 얻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였다. 그 걱정 끝에 전태열이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 묘역도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가족들도 흔쾌히 응했다. 광주를 원칙으로 하되 광주에 장지를 얻기 어려우면 서울로 하자는 합의에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난감하게 된 것은 변호사 둘이 터무니없이 보상 문제에 대한 약속을 한 셈이 된 일이었다.
김우중에게 법률적 책임이 없음은 명백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려 할 텐데 우리가 국가의 과실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분명 가족들의 입장은 보상 없이는 장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법적으로 보상을 받으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장례절차는 노조에 일임한 것인데 우리가 과연 그런 책임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가족과 만나기 전부터 바로 이 보상 문제 때문에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었다. 자신의 책임이 이같이 분명하게 된 후에는 장례의 무기 연기를 계속 주장하게 된다.
23일의 일은 이 정도로 끝이 나고 이 변호사는 호텔로 갔고 양 신부와 나는 청년들과 함께 밤늦게야 여관에 들었다. 그곳에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지적되었다.
첫째, 대우조선 노동자들은 매우 흥분하여 있으나 집행부에서 부여받은 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 이외에는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앉거나 서서 잡담을 할 뿐이고, 서성거리고 있는 동안 지리멸렬한 오합지졸로 변하여 노조 집행부에서 조직적으로 통제를 할 수도 없고 반면에 조그만 자극에도 무분별한 가두 진출과 폭력이라는 행동으로 나아갈 우려가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대중에 대한 신속하고도 체계적인 정보전달의 체계, 흥미를 끌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등의 수단을 통하여 대중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대중을 질서 있는 집단으로 유도하는 한편, 그와 같은 작업을 노조 집행부가 주도함으로써 노조 집행부의 지도력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지금은 노동자들이 고 이석규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오로지 장례의 의제를 전체 노동자와 전 국민이 함께 분노하도록 확산시켜 나가는 것만이 동지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오로지 장례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태도에는 고 이석규의 죽음을 노사협상과 연계하는 것이 남의 불행을 자기들의 이익으로 이용하는 것 같이 생각될 것을 우려하는 심리도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노사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장례를 치를 경우 자칫 장례식 때에는 또 한 번의 예상 못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장례식이 광주나 서울로 될 경우 경찰이 장례행렬을 저지하려 할 것은 명백하므로 이러한 우려는 매우 가능성 높은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장례 전에 임금협상이 타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떻든 서울로 가야겠다던 양 신부가 그럭저럭 발이 잡혀 결국 25일 저녁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나도 사실은 하루 만에 돌아오려고 했는데, 다음날 부검 참여, 장의절차 논의, 노조집행부와의 논의 창구 역할 등의 문제로 계속 눌러 앉았다.
장지, 광주 망월동이냐 서울 모란공원이냐
8월 24일 오전에는 부검이 있었다. 참혹한 죽음이었다. 부검 도중에 사인이 확인되는 부분을 보고 먼저 나와 버렸다. 이날 오전부터는 노동청년들이 대자보, 유인물 등으로 노동자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모으고 있었으나 아직 집회 프로그램 등은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재야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모였고, 서로 운동 분야가 다른 점 등으로 우리들 상호간의 의견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하여 오후 2시경 장승포 성당에서 모였다. 이때 이 변호사와 나, 장승포 성당 강 신부가 함께 한 것으로 명확히 기억이 되나 양 신부가 그곳에 함께 하였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으나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에서 노동자 장을 국민장으로 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장지는 광주와 서울 두 군데로 의견이 갈리다가 결국 서울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마지막 장례일자에 관하여도 7일장, 9일장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나는 무기 연기를 주장했다. 결국 피해자 보상, 사과, 가해자 처벌 등의 원칙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7일장이나 9일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선행조건이 타결된 후에야 장례를 할 수 있다는 조건부의 것이었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조건부 7일장이냐, 무기 연기냐는 노조와 의논 과정에서 기술적으로 선택할 문제로 남겨두자고 의견을 모았다.
다만 우리는 이 논의에서 우리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노조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일 뿐이고 최종 결정은 노조가 할 사항임을 명백히 하였다. 그와 같은 결정의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런 원칙의 확인 없이 노조와 대화를 할 경우 자연히 이쪽의 주장이 집요하게 되고 그럴 경우 노조에게 지나친 간섭이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위에 거론된 문제들은 유족들과도 협의가 있어야 할 문제이나 그 문제는 전날 저녁에 이미 유족과 합의가 명백히 되어 있었던 것이라 별 문제로 보지 않았다.
15시에 노조 집행부와 연석회의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사무실로 갔더니 노조 위원장이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위원장 양동생이 김우중을 원망하면서 ‘기본급 10,000원, 현장수당 2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나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알고 보니 낯선 사람은 노동부 부산지청장이었다. 그 대화내용에 따르면 결국 위원장 양동생은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면 합의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낯선 사람이 가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 변호사, 양 신부, 강 신부, 거제 황 선생, 내가 함께 하였다. 노조 측에서도 대부분의 임원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가족을 모셨다. 가족을 모셔야 한다는 것은 이 변호사가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족들이 장례는 5일장으로 하고 장지를 남원으로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뒤늦게 부검할 때 도착한 삼촌이라는 사람이 오고부터 갑자기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곳에서는 삼촌이라는 사람이 현역 소령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고, 신문에는 교사라고 나왔다. 지금도 보상 문제로 그렇게 애를 태우던 가족들의 입장이 어떻게 하여 순간 그렇게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나 뜻밖이었으나 가족들 간에도 다시 한 번 의논을 해보아 달라고 하고 우선 논의를 시작하였다. 처음 장례 명칭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장례 명칭 문제의 논의가 시작될 무렵 노조간부 한 사람이 구속자 석방 교섭에 나서 달라고 하여 김봉조 의원을 따라 옥포호텔을 다녀오는 바람에 회의에서 빠지게 되었다.
갔다 와 보니 명칭 문제는 국민장으로 결정되었고, 장지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노조 임원은 본시 10명이 넘었던 사람들이 각기 맡은 일을 하러 나가고 4명만 남아 있었고 양 신부, 강 신부 두 사람과 이 변호사, 현지 황 선생으로 입장이 나뉘어져 서로 설득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신부 두 분은 광주 망월동 묘지가 좋다는 입장이고 이 변호사와 황 선생은 서울이 좋다는 입장이었다. 형식적 논리로는 최루탄으로 사망한 사람이니 이한열 군 묘역이 좋다고 할 수도 있고, 노동운동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이니 전태일이 묻혀 있는 서울 모란공원이 고인의 죽임의 의미를 오래 기리는 것이라는 의견 대립일 수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이 사건의 의제를 어느 정도 국민에게 크게 부각시킬 것인가의 입장 차이와 대우조선소의 노사분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 어느 쪽이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 입장의 차이에서부터 연유하는 의견 대립이었다.
어떻든 문제는 노조 집행부 임원은 4명 정도만 앉아 있는 상황에서 원칙적으로 그들에게 조언하고 조력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장황하게 논의를 계속하는 것이 자칫 주객이 전도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그동안 충분한 표의는 되었으니 결정을 노조에 맡기기로 하고 산회하자고 제의하여 산회가 되었다. 나머지 장례일자에 관한 문제는 저녁 먹고 다시 논의를 하기로 하였다.
(중략)
이날 저녁(24일 10시경) 노조위원장은 기자들 앞에서 6개항 요구조건, 장례 무기 연기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이 노사분규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 점에 관하여는 이제야 수습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입장과 점점 수습이 어렵게 되어 버렸다고 보는 입장이 나뉘었다. 그러나 이 선언이야말로 노사분규가 수습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언론의 어떤 왜곡보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진실이다.
24일에는 부검을 마치고 부검 결과 보고 집회가 있었으나 집회 후 별다른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25일부터는 노동자들의 수가 현저히 늘어났고, 대자보 유인물 집회 등을 통하여 차츰 질서가 잡혀갔다.
유족들의 태도 돌변, 노사협상은 교착
8월 25일 오전. 민주당 조사단이 왔다. 얼마 후에 그들은 노조 간부 몇 사람과 양권식 신부와 함께 병원 회의실에서 회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변호사와 함께 갔다. 가 보았더니 회합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끝난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가서 판을 깨었는가? 진상조사를 하러 온 민주당원들이 굳이 우리를 빼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노조에 영향을 주어 요구조건을 내걸고 장례를 무기 연기하게 한 것이 분규의 수습에는 관심이 없고 문제를 파국으로 몰아가려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우리가 가서 앉자 최형우 부총재가 어떻게든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런 오해는 분명했다. 그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도 분규의 원만한 수습을 원한다. 다만, 우리는 장례의 무기 연기라는 이쪽의 분명한 결의가 결국 빠른 수습의 실마리가 된다는 점, 그리고 수습을 위한 협상도 항상 그 결론이 대의와 원칙에 최대한 접근된 것이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후에는 규탄대회가 있었다. 이소선 여사의 발언 등에 이어 옥포호텔에서 전경으로부터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 아주머니의 진상보고, 픽업으로 전경을 치었다 하여 구속된 사람의 가족의 호소, 최루탄을 가지고 놀다가 폭발하는 바람에 배를 다친 9세 어린이의 어머니의 호소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나온 처절한 참상을 그 뒤 누구도 보도하지 않았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장지를 서울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 다시 분위기를 이어갈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던지 서울에서 온 노동운동가들이 나서서 노래를 가르쳤다. 혹시나 거부감을 보일까 싶어 불러내고 노동자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권유했다. 조금 있으니 대우 노동자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와서 노래 등을 재미있게 끌고 나갔다. 그동안 경인지역 노동운동가들의 활동이 매우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는데, 그들은 잘 해나갔다. 그들은 과격시위를 선동하지도, 과격 주장을 한 일도 없다. 장례위원회 실무부서에서 열심히 맡은 일을 하거나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를 하는 등으로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는 것 같았다. 덕분인지 우리도 다니다보면 노동자들에게 ‘고맙다, 수고한다’는 인사를 자주 받았다.
25일, 노동자들은 수가 많아지고, 질서가 잡혀가고 노조 집행부도 자신감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리드하는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24일 오전 고인의 삼촌이 들어온 후부터 유족들이 종전 입장을 바꾸어 24일 오후부터 장지 등 절차에 이의를 제기할 때만 해도 노조나 노동자들의 바람이 모두 광주나 서울로 모여 있어서 노조에서 쉬 설득할 수 있으리라 보았는데, 의외로 25일이 되니 태도가 더욱 완강해졌다는 것이고, 더욱 난감해진 것은 24일 오후 노조의 강경 선언이 나오자 그 다음날부터 각 신문사 데스크에서 취재기자들에게 취재방향을 지시하였다는 소문이 나돌고, 실제는 취재방향도 현저히 달라진 것이 눈에 보였다.(가족과 노조, 재야 3자간의 갈등의 증폭, 노조가 재야 손에 끌려가는 듯한 인상의 확대)
드디어 오후 5시에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한다고 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모든 것은 장례위원회에 맡기기로 하고 보상이나 꼭 좀 받게 해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또 장례를 크게 한다는 말에 공감을 표시하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달라졌는가. 어떻든 그 결정이 가족 자신들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우리 국민에게나 어느 모로 보나 잘못된 결정이라는 사실은 머지않아 밝혀질 일이나 당장 답답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변호사와 나는 유족들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설득해 보기로 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때도 나는 우물쭈물 하다 보니 이 변호사 혼자 가서 설득을 하게 되었고, 내가 갔을 때는 이 변호사가 일어서 나오는 참이었는데 한 마디 거들었다. “한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 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 보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 권유가 뒤에 장[례]식 방해라는 범죄사실이 되니 어처구니없다.
그날 저녁. 이 변호사와 나는 양 신부와의 사전 회합을 그쳐 노조 집행부 회의에 참여하였다. 그 회합은 양 신부의 요청으로 열린 것이고 사실상 양 신부가 주재한 것이었다. 양 신부는 우선 우리를 만나서 김우중이 옥포호텔에 와서 협상을 포기하고 가려고 하는 것을 겨우 빌어서 1시간 정도 말미를 받았으니 이제 최종적으로 노조와 한 번 더 절충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도 노조를 설득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함께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노조에서 내건 임금요구 조건은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20,000원, 주택수당 10,000원이었으나 전날 노조위원장이 부산노동지청장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로 보나 일반노동자들의 분위기로 보아 실제요구는 기본급 20,000원, 현장수당 10,000원, 주택수당 10,000원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회사 측의 기본급 10,000원, 현장수당 20,000, 주택수당 10,000원이라는 조건 사이에서 총액은 같고 단지 돈 10,000원이 기본급여로 가느냐 현장수당으로 가느냐의 차이로만 생각하고, 기본급과 현장수당 간에 15,000원 : 15,000원이라는 방식도 권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회의가 열리자 양 신부는 이제 김우중이 협상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려는 최후의 순간임을 말하고 노조의 마지막 카드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노조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협상금액을 말하기 전에 김우중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대우조선이 적자라는 것이 대우계열기업과의 거래에서 흘러나가는 부분, 경영부실 관리부실 등에 기인한 것이라거나 저임금이 노동생산성 저하, 자재낭비로 이어지는 요인이라는 등의 얘기가 계속된 다음, 10원 한 장도 후퇴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날 저녁 노조가 재야에 끌려간다거나 재야가 불순단체라거나 하는 등의 KBS 방송 내용이 이들의 감정을 건드린 결과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어떻든 우리는 한 마디 양보를 권해 볼 엄두도 못 내고 물러나왔다.
장례 무기 연기가 협상 타결에 주효
그날 밤 아니 8월 26일 새벽 2시. 김우중은 기자회견에서 협상 포기, 장례 후 협상을 선언했다. 이에 대한 노조 간부들의 반응은 김우중이 노동자 하나 죽어 갖고는 끄덕도 없는 모양이다, 여럿 죽어야 될 모양이다거나 대우조선 그만두라 해라, 우리도 김우중이 대우조선 그만두는 꼴을 봐야겠다는 등의 말로 표현되었다.
그날 저녁 늦게는 우리 재야운동가들 전원이 병원 인근 잔디밭에서 회합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청년운동가들은 직접 모든 일을 도와주려고 하지 말고 그들 손으로 직접 일을 해보도록 해야 한다는 반성들이 나왔다. 그와 같은 반성의 요지는 바로 건전한 노조의 육성을 위하여는 그들에게 일을 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장기적이고 온전한 노조운동을 전제로 한 것이지 결코 이 판단은 폭력시위나 소요의 판으로 끌고 가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 반성뿐만 아니라 일 전체에서 건전한 노조의 경험을 최대한 이전해 주고자 하는 노력들이 역력하였다. 그밖에 우리는 우리들의 활동이 너무 의욕이 넘친 나머지 산만해지고 무질서해질 우려가 있다 하여 체제를 정비해 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날 밤 늦게 조선일보 기자 한 사람에게 저녁에 노조 회합에서 노조 간부들이 발언했던 요지를 정리하여 전해 주었다. 그때까지 기자들의 취재방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사용자적 시각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시도해 보았던 것이었으나 역시 보도는 없었다.
26일 아침부터 별 할 일이 없었다. 노조에서는 어제 저녁 KBS의 보도에 대하여 반박성명을 발표하였으나 보도가 된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날 KBS 기자는 쫓겨났다. 11시경 김봉조 의원이 노조 집행부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이 변호사가 노조의 설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돕겠다는 내용의 쪽지를 김 의원에게 전한 후 김 의원과 병원장 부속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이 변호사는 또 기본급과 현장수당 간에 15,000원 : 15,000원 방식도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점심을 먹으면서 이 변호사와 나는 협상이 원만히 타결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고 김우중이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오도록 한 것은 결국 장례 무기 연기라는 카드가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하였다.
그리고 다만 노조에서 유족 보상의 문제, 구속자 석방 문제 등을 모두 놓쳐 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으나 그 문제는 더 끼어들지 말자고 의논하였다. 이제 어려운 문제는 거의 매듭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점심 먹고 여관에서 한숨 자고는 저녁 18시 30분 배로 부산으로 왔다. 물론 부산운동본부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이 내가 거제에서 겪은 일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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