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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어머니’ 박용길 장로 별세

양현모 2011. 9. 25. 11:13

박용길 장로 별세
유연석 (laneige81) 기자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운데). 2007년 17일 문산역에서 열린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행사에 참석한 모습.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박용길

고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가 25일 오전 1시 30분 별세했다. 향년 93세.

 

박 장로는 황해도 수안군 금광에서 박두환, 현문경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박 장로는 경기여학교와 일본 요코하마 여자 신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도쿄 지역 한국 신학생들의 모임인 관동조선신학생회에서 문익환을 처음 만났다. 박 장로는 "이마가 넓고 잘 생긴 얼굴이여서 눈에 띄었다"며 문 목사를 회상했다. 1944년 6월 17일 안동교회에서 문 목사(당시 신학생)와 결혼했다.

 

1976년 3·1사건으로 문 목사가 투옥되자 박 장로는 구속자 가족이 되어 투쟁의 길을 걷는다.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 문 목사가 우리 민족이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아 분단이 되었으니 통일을 준비를 해야 한다며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을 시작한 지 열흘만이었다. 이 일을 박 장로가 이어받았다. 박 장로는 문 목사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통일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곳에나 달려갔다.

 

박 장로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신도회 총무를 맡아 일하고 그 후에도 임원과 협동총무로 일했다. 통일맞이·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화협·통일연대 상임고문과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남측준비위원회' 명예대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하기도 했다.

 

1995년 6월 김일성 주석 1주기를 맞아 평양을 방문했으며 2000년 10월에는 노동당 창건 55돌(10.10) 초청 인사로 방북하기도 했다. 2005년 남북 화해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유족은 딸 문영금 씨와 아들 의근, 성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이다. 문의 전화 02-2072-2010.

 

문익환 목사와 통일운동 한평생…

‘봄길’ 떠나다

‘통일 어머니’ 박용길 장로 별세
74년 ‘민주구국선언’ 남편 문 목사 투옥돼 투쟁의 길
94년 문 목사 별세뒤 ‘칠천만 겨레모임’ 이어 받아
양심수가족협 구성…김일성 1주기 방북으로 옥고
한겨레 유선희 기자기자블로그
» 박용길 장로(오른쪽 둘째)가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과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오른쪽 두번째)와 함께 시위를 벌이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고 ‘늦봄’ 문익환 목사의 아내이자 한국 통일운동의 산증인인 ‘봄길’ 박용길 장로가 25일 오전 1시30분 별세했다. 향년 92.

박 장로는 1919년 9월1일 황해도 수안군 금광에서 박두환·현문경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한말 기마장교 출신이고, 어머니 역시 당시 한성 사범학교를 나온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박용길 장로 역시 경기여학교를 나왔으며,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를 졸업했다.

박 장로는 1938년 도쿄 지역 한국 신학생 모임에서 남편인 문익환 목사를 처음 만났다. 박 장로는 “(문 목사는) 이마가 넓고 잘생긴 얼굴이어서 눈에 띄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문 목사의 몸이 약하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집안 식구들에게 “6개월만 같이 살아도 좋다. 문익환과 결혼할 수 없다면 평생 전도사 일을 하며 독신으로 살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박 장로는 1944년 6월17일 안동교회에서 문 목사와 결혼을 한다.

» 1990년 10월 전북 전주 예수병원에서 입원 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문익환 목사와 함께 인터뷰하고 있는 박용길 장로(맨 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 2007년 5월 시범운행하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한을 방문하기에 앞서 서울 수유리 자택 ‘통일의 집’ 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박용길 장로. <한겨레> 자료사진

박 장로는 1976년 문익환 목사가 ‘3·1 민주구국선언’에 연루돼 투옥되면서 본격적인 투쟁의 길을 걷게 된다. 문 목사가 통일·민주운동의 길에 뒤늦게 들어섰다는 뜻으로 ‘늦봄’이라는 호를 짓자, 박 장로는 그 길에 끝까지 함께 동참하겠다는 의미로 호를 ‘봄길’이라고 짓기도 했다. 1989년 문 목사가 김일성 주석 면담을 위해 평양 방문을 결정하고서도 주저하자 박 장로가 “정말 실망했다. 내 남편이 그렇게 우유부단한 줄 몰랐다”며 결단을 촉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문 목사가 1994년 1월18일 심장마비로 갑자기 별세하면서 박 장로는 남편을 대신해 통일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문 목사가 “우리 민족이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아 분단이 됐으니, 통일은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시작한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 모임’을 이어받았다.

» 1995년 김일성 주석 1주기 행사 참석을 위해 방북한 박용길 장로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 장로는 1974년 민주화 투쟁에서 구속된 이들의 가족모임인 ‘양심수가족협의회’의 구성도 주도했다. 그는 1995년 6월 김일성 주석 1주기 때 단신 방북해 옥고를 치렀으며, 2000년 10월에는 노동당 창건 55돌 초청 인사로 방북하기도 했다. 2005년 남북 화해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박 장로는 문 목사가 그랬듯 ‘각막’을 기증했다. 유족은 딸 영금, 아들 의근(제이피모건 시카고 부사장), 성근(배우)씨, 며느리 정은숙(성신여대 석좌교수), 김성심씨와 사위 박성수씨가 있다. 장례는 ‘겨레장’으로 4일 동안 치러진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이다.(02-2072-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