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의 발언에 새삼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나이들어 이런 저런 결기를 잃어버리고 현실에 순응하거나 지독한 실망감에 악담을 일삼는 그런 저런 ‘아버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한 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민주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고, 언론에 보도된 몇마디 말로 심중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는 ‘시인 김지하’라는 존재를 익숙히 알고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 또한 사실이다.
KBS 주말드라마 <내 딸 서영이>가 40%에 가까운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내 딸 서영이>는 아버지 삼재(천호진)의 존재를 ‘부정’하고 우재(이상윤)과 결혼한 서영(이보영)이의 쉽지만은 않은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다. 패륜 혹은 막장이라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내 딸 서영이>의 힘은 단순히 자극적인 설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서영이 아버지를 버린 것은 아버지의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권위만 앞세울뿐 무능력으로 인한 가족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통과 이해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영은 그 과정 속에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가족의 존재를 부인한 스스로로 인해 가족이 줄 수 있는 위로의 몫까지 상실한 상태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내 딸 서영이>에서 흥미로운 점은 삼재의 태도이다. 서영의 ‘패륜’에 대한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 가족주의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감정을 노출한다. 도덕적으로 비난할 순 있지만 현실적으로 서영의 행동이 충분히 용인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부장으로 대변되는 가족주의에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게 한다. 부양의 책임이 있으며 (이유가 어찌됐건) 무능할 경우 존재에 대한 부정이 인정된다는 점인데 아버지에게 있어서 경제력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권위를 넘어서는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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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정일의 문제제기로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지만, 시인 김지하가 최근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해. 두 아들 놈 유학 보내 공부시켜야 해. 아들 둘이 대학엘 못 갔어. 요즘 세상에 대학도 못 나오면 어디에 쓰나…. 대학 못 보낸 부모 한(恨)을 모른다. 아이들 속에도 한이 맺혔을 거야"라고 말한 대목이 떠오른다.
김지하가 말한 “자식들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에 걸맞는 가치를 위해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결혼할 때 본인의 능력보다 ‘집안’의 능력이 중요하게 생각되고, 고 스펙을 위해 노동을 하지 못하는 동안 교육을 위해 많은 자본의 투여가 불가피한 지금, ‘부자아빠’에 대한 영웅화와 환상화는 자식 뿐만 아니라 부모, 특히 아버지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좌절감을 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고스펙을 위해 자식들에게 적극적으로 자본을 투여하고 그를 통해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되어버린 지금이다. 한편으로 가부장제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지만 자식 세대의 경제적 종속을 통해 발전단계 혹은 의지와는 별개로 그 제도는 존속되고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부가효과로 이런 것들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의 포섭력은 민주화의 상징적 인사까지도 돌아서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저런 희망을 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돈이 많은게 낫다는 논리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지극히 일반적인 판단으로 들린다. 경쟁적 고스펙과 교육열은 자식을 볼모로 부모의 현재를 저당 잡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슬픈 초상이다. <내 딸 서영이> 삼재가 될 바엔 김지하가 되는 것이 나은 것일까. 과연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접점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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