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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많다

양현모 2011. 6. 12. 22:04

'미친 소'이어 '미친 등록금'까지
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많다
[정치 톺아보기] 김준엽과 에셀, 두 '저항군'의 삶
김당 (dangk) 기자

 

 
  
▲ '마지막 광복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왼쪽부터).
ⓒ <장정>
광복군

여기 낯익은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학도병인지 정규군인지 모를 복장을 하고 어깨에 경기관총을 멘 청년 셋.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식민지 조국의 광명을 되찾기 위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한 '마지막 세대'인 노능서(魯能瑞)·김준엽(金俊燁)·장준하(張俊河)의 20대 시절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이 빛바랜 '마지막 광복군' 사진은 8·15 해방 전에 찍은 사진이 아니다. 8·15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지 않은 1945년 8월 20일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현(濰縣)의 한 사진관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청년들의 표정에선 도무지 광복의 환희를 느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해방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3명의 광복군

 

세 청년은 중국 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支隊)에서 미국 정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지원하에 한반도 진입을 위한 특수훈련을 마친 지하공작대(제1기생 50명)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 군사사절단(18명)이 탄 미군 수송기에 사령관 이범석과 함께 편승해 8월 18일 낮 12시 30분쯤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한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로서 가장 먼저 해방 조국의 땅을 밟은 영광도 잠시, 이들은 착검한 일본군에 포위되어 비행장에 연금된 채 이튿날 미군과 함께 추방된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일본 조선군사령부'의 입장은 단호했다. "지금은 일본이 정전만 한 상태이니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뒤에 재입국하라"는 거였다. 결국 선발대를 태운 미군기는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복귀 중에 연료가 떨어져 산둥성 웨이현에 불시착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위한 OSS특수훈련을 마치고서도 자기 땅에서 쫓겨난 울분에 찬 청년 3명이 시안의 제2지대로 복귀하기 전에 이국땅의 한 사진관에서 여의도비행장 착륙 당시의 복장을 하고 기념촬영을 하게 된 배경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이 아름다운 청년 중에서 가장 앳되고 무선 통신에 능했던 노능서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해운업에 종사했다. 이범석 장군 부관을 지낸 김준엽은 중국에 남아 학문의 길을 걸어 고려대 총장을 지냈으며, 장준하는 70년대 <사상계> 발행인이자 정치인으로서 일본군 소위 출신 대통령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의 평생 동지이자 '연인 같은 절친' 관계였던 김준엽(1920년생) 선생이 7일 91세로 영면했다.

 

고인은, 소설가 서해성의 말처럼 '삶을 교과서처럼 쓰신 분'이었다. 후학들에게 책에서 배우지 않는 걸 온 몸으로 가르쳐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 몸으로 돌파해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신의주고보를 졸업한 그는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1943년 10월 일제가 '학도 지원병제'를 시행하자 유서를 써놓고 '자원 입대'한다. 중국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실제로 이듬해 입대 후 중국 서주(徐州) 근처의 경비중대에 배속된 지 한 달여 만에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첫 번째 결정적 선택이었다. 이후 중국군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장정(長征)에 오른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진정한 보수주의자 김준엽

 

두 번째 결정적 선택은 해방 이후 임정 요인들과 광복군이 귀국할 때 환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 중국사를 공부한  것이다. 김구 주석은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고, 6000㎞ 장정과 생사를 함께 한 평생 동지 장준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는 당시 정계 투신과 학자의 길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학자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후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그는 회고록 <長征(장정)>에서 자신의 선택을 이렇게 기록했다.

 

  
김준엽의 <장정 1 - 나의 광복군 시절>의 표지.
ⓒ 나남
장정

"이 때의 나의 선택은 나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나는 고대(高大)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년간 이때의 결심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지켜내려 왔고 수 차례의 벼슬 유혹이 있었으나 아무 거리낌 없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발전에 있어서의 나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차례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특히 20대에 세운 가치관은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장정 1 - 나의 광복군 시절>, 452~453쪽)

 

고인은 20대에 선택한 학문의 길을 초지일관해 평생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중국공산당사>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5권, 공저) 같은 기념비적 연구-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이 소장(1969~1982)으로 재직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고인의 고려대 총장 재임기간(1982~1985)은 짧았지만 그 시절을 함께 한 학생들에게는 '영원한 총장'으로 기억된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의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정권의 압력을 "내가 그만 두겠다"며 막아낸 버팀목이었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에서 재학생과 졸업생이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를 벌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고인은 이승만 정부에서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12회의 공직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87년 6월항쟁 이후 노태우 대통령당선자로부터 6공화국 초대총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장정 4 - 나의 무직시절>에 남겼다. 그중 하나는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국정자문회의 의장인 전두환에게 고개를 숙이는 총리의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제자와 학생이 아직 감옥에 있는데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인은 중국 및 공산권 전문가로서 국가를 위해 일해 달라는 정부의 부름에는 응해 UN총회 한국 대표를 두 번(61년과 74년)이나 지냈다. 고인은 평생 공산권 연구에 매진한 민족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진보적 후학들은 물론, 과격한(?) 운동권 제자들도 따뜻하게 포용하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이념적으로는 보수주의자지만 좌와 우를 넘어서 존경받는 '시대의 스승'은 자신의 저서 <역사의 신>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영원한 광복군'이 운명한 날, '운명'처럼 한국에 상륙한 '분노하라'

 

  
프랑스에서 출간 7개월만에 200만부를 돌파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한국어판(임희근 역, 돌베개)의 표지.
ⓒ 돌베개
분노하라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이 90세 인생의 장정을 마감한 7일,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90대 노투사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의 외침을 담은 <분노하라>(임희근 옮김, 돌베개)가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를 꿈꾼 '마지막 광복군'이 운명하던 날,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90대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은 공교로움을 넘어서 '운명'처럼 느껴진다.

 

1917년 독일 출생으로 7살에 유태계인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한 에셀은 스무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 예비학교를 거쳐 1939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 해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돼 페탱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41년 드골 장군이 이끈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방첩·정보·행동 담당총국(BCRA)에서 일한다.

 

그는 44년 3월 '그레코'라는 암호명을 받아 비밀리에 프랑스로 파견된다.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세력이 연합군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영국에 관련 정보를 송출할 수 있도록 방송 포스트를 찾는 일을 지원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에 체포돼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전후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에셀의 첫 직장은 국제연합(UN)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48년 UN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UN주재 프랑스 대사, UN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퇴임 후에도 세계의 인권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10월 프랑스의 한 영세 출판사에서 초판 8000부를 찍은 소책자가 7개월 만에 무려 200만부를 돌파한 것도 그의 열정에 세상이 감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르몽드>지가 서평 머리기사에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라고 제목을 뽑은 이 작은 책자가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간결하고 확고하다.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 분노는 '자유 프랑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레지스탕스가 쟁취한 사회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분노'와 '평화적 봉기'가 세상을 바꾼다

 

에셀과 그의 동지들의 '자유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따라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을 비롯해, 1944년 3월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채택한 개혁안은 지금 이상과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분노'다. 그래서 에셀은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분노하라, 평화적 봉기를! 2010년 3월의 유럽의 정치집회에 참석한 스테판 에셀. 세계를 뒤흔든 이 94살의 레지스탕스는 젊은이들에게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외친다.
ⓒ 위키미디어
스테판 에셀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분노하라>, 15쪽)

 

에셀은 이처럼 분노의 이유를 찾아내 그것을 '참여'로 이어나가자고 강조하면서도,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21세기를 만들어갈 당신들에게 우리는 애정을 다해 말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고." (같은책, 38~39쪽)

 

역자 임희근은 그의 이런 메시지를 "진정 행복하려면 제때에 분노할 줄 알라"는 한 마디로 표현한다. 공분(公憤)도 좋지만 먼저 자신의 행복과 변화를 위해 분노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레지스탕스'는 어때야 할까? 에셀은 역자와의 인터뷰에서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가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젊은이들은 옛날 레지스탕스 당시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상의 각종 네트워크(SNS)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랍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일을 훌륭히 해냈고, 그리하여 독재자를 축출하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같은책, 63쪽)

 

신기할 만큼 닮은 두 '저항군'의 인생행로와 역정

 

70년 전 아시아는 일본과, 유럽은 독일과 전쟁을 치렀다. 그 전쟁은 불의에 대한 저항(레지스탕스)에서 출발했다. 김준엽과 에셀의 출발선과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격동의 20대에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1945년 8월)을 겪으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선택한 두 '저항군'의 인생행로와 역정은 신기할 만큼 닮은꼴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유학 중 '자원입대'해 일본군을 탈출,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해 항일 유격전∥독일 태생으로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 페탱 군대를 떠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프랑스 해방전쟁에 참전 ▲광복군 지하공작대(레지스탕스) OSS특수훈련 마치고 국내정진군 활동∥연합군 상륙작전 지원 위한 레지스탕스 활동중 체포돼 사형선고 받고 탈출 ▲전후 중국 및 공산권 전문가로서 UN총회 한국 대표 역임∥외교관으로 UN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 참여, UN인권위 프랑스 대표 역임(김준엽∥스테판 에셀)

 

그런데 김준엽이 운명한 날, 에셀의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으니 어찌 '운명'이라고 하지 않을 텐가. 그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미래 세대와 청년을 사랑한 점이 닮았다. 김준엽은 22살 때 유서를 쓴 결의와 소신에 대해 "총장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할 적에 항상 이때의 나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처신하였다"면서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신의 내용이 옳고 그르고는 다음의 문제이고,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의 정의에 불탄 당당한 태도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서 기성세대는 이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장정 1>, 27쪽)

 

에셀은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면서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주변을 둘러봐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주제들―이민자, 불법체류자, 집시들을 이 나라가 어떻게 취급했는지 등등―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강력한 시민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체적 상황들이 보일 겁니다. 찾아요. 그러면 구할 것입니다!" (<분노하라>, 26쪽)

 

그렇다. '미친 소'에 이어 '미친 4대강'과 '미친 등록금'까지,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넓고 분노할 일은 너무 많다.